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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0.03.16 14:17:34
  • 최종수정2020.03.16 14:17:34
일제 침략기 역사와 조선 전기 파란만장한 삶의 살았던 신숙주를 생각한다.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오랜 정치를 해 온 신숙주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신숙주 선생에 대한 글을 써 볼까 한다.

묵정영당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길 71-29(관정리 428)에 위치한 사당으로 보한재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기리와 묵정리가 조성됐고 하나로 묶이면서 관정리가 됐다. 묵정은 마을 우물 빛이 먹물처럼 검게 보였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묵정영당 문은 닫혀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주위를 둘러본다. 옆에 신도비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로 신중엄신도비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록해 묘 입구에 세운 비를 말한다.

죽은 사람의 뛰어난 업적과 학문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다. 신중엄은 신숙주의 4세손이며 임진왜란에 자신의 곳간을 열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국난 대처에도 노력했다.

광해군 11년 (1619년)에 세워진 것으로 심희수가 시문을 지었고 이산뢰가 글씨를 썼다. 조선시대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이 제도화됐고 이 신도비 역시 조선시대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신도비 이수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표현됐다고 한다.
신숙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성삼문이다. 절친이자 같은 집현전 학자였던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충신 중 하나로 의리와 충절의 인물로 존경 받는다. 한편 신숙주는 한명회와 함께 세조를 도와 조선의 역사를 바꿨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시 외직에 나가 있었는데도 2등 공신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때부터 신숙주는 출세 가도를 달린다. 도승지, 병조, 예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세조 8년에 영의정이 된다. 물론 그 이전에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담장 이맛돌에 '묵정사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됐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다.

앞서 성삼문과 신숙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결국 성삼문은 단종에 대한 불충을 저지를 수 없어 '능지처참' 당한다. 반대로 신숙주는 탄탄대로를 달리며 변절의 대명사로 알려진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대에 평가 받는다. 하지만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여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는 신숙주는 탁월한 실력가가 아니었을까. 세조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와 신숙주지만 성종에 의해 부관참시 당하는 한명회와 달리 신숙주는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말이다.
묵정영당 일대를 구경하고 백석정으로 향한다. 거리가 가까워 올 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숙종 3년 동부 주부를 지낸 식교가 지은 고령신씨의 정자다. 청주 상당산성의 동쪽에 있다고 해 일명 산동 신씨로 불리는데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꼽힌다.

아래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고 백석정으로의 길은 절벽 사이의 좁은 길이다. 눈이 오니 제법 운치 있는 길이지만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곳에서 당대의 문인, 문장가들과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소통의 장이었던 곳이다. 백석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휴식하기 좋으며 흐르는 맑은 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자 이름은 물가에 기묘하게 돌출한 흰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지금 모습은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백석정 배면 가운데 기둥을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고 웅장한 정자는 아니지만 4계절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백석정이다. 신숙주 선생에 대해 다시 한 번 공부하며 무거워진 머리를 이 곳 백석정에서 시원하게 만들고 나니 한층 성숙해진 기분이다.

/ 청주시SNS서포터즈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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