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백무산 등으로 대변되는 1980년대 노동 시편들은 민주화 열기의 고취, 분단체제 인식과 통일의식 함양, 리얼리즘 세계관의 적극적 개진, 노동해방 운동의 심층화, 서구 매판자본에 대한 비판의식 고취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반면에 불구적 당대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세계를 제시하지 못한 점,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의 확장에 따른 개인 감각의 획일화, 선전 선동에 치우진 시적 주제의 경직화, 이념과 사상의 강조에 따른 사적 욕망의 홀대, 언어 미학의 고갈 등 부정적 측면 또한 드러냈다.
이런 일장일단의 상황 속에서 백무산은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9)를 출간한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노동 계급의 정체성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노동문학의 시각과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이 문제적 시집은 1980년대 파쇼적 군사정권 체제에서 유입된 마르크스 세계관의 시적 반영물이며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계급성을 자각케 하여 삶의 변혁을 추동한다. 이후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에서는 1988년 말부터 1989년 초까지 약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울산 현대중공업 대파업투쟁을 다룬다.
이 두 권의 시집 출간 이후 백무산은 노동자들의 핍박받는 삶의 조건과 모순들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 문제, 인간 존재의 근원에까지 사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간다. 그 결과가 세 번째 시집 '인간의 시간'(1996)이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인간과 자연과 노동의 새로운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비판적 담론을 낳고 창조의 근본원리에 대해 재탐색한다. 위의 시 '인간의 시간'은 시인의 이런 시각과 사색, 전복적 사유가 진술된 표제작이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하고 배반하고 이런 단절의 꿈이 역사를 추동하는 동력이 된다.
/ 함기석 시인
인간의 시간 - 백무산(白無産 1955∼ )
깃털처럼 내린다
구름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풀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 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흙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온,
날로 썩어가고 황무지만 진전시켜온
죽은 시간을 전복시킨다
대지는 단절을 꿈꾼다
(…)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