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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버려진 다리 위에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9.12.05 17:54:45
  • 최종수정2019.12.05 17:54:45
이윤학의 시는 상처와 폐허의 풍경들로 채워진다. 폐허 속에서 시인은 견디며 연민의 시선으로 사물과 풍경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바라본다. 기억 또한 암울한 상처이므로 그의 눈길은 현재에서 끝없이 과거로 옮겨간다. 고통스런 옛 기억들을 현재로 호환하는 이 추억의 과정에 상처 받은 자아상들이 나타난다. 풍경과 인물을 통해 시인은 기억의 시간대로 이동하고 그것을 다시 현재로 호환한다. 즉 시인에게 시는 폐허를 이미지로 확인하는 처절한 초상화 작업인 셈이다. 풍경에 대한 이미지 묘사는 시인의 실존적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육체는 온통 폐허로 가득 찬다. 그의 시에 벌레나 곤충이 인간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더기, 달팽이, 잠자리, 제비, 염소 같은 존재들을 시인은 자신과 동일시하여 버려진 존재, 견디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구더기는 몸담고 살던 구덩이가 싫어졌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기어올라가야 했다/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알이 눈이 띄게 커지고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만은/ 깨끗한 곳에서 먹이를 찾아야 한다/ 목숨을 위해 더러운 곳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터질 듯이 부른 뱃속에 알을 끌고/ 수렁을 벗어났다 구더기는/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알을 낳았다 구더기는 빈 몸이 되어/ 눈부셨다// 호기심 많은 눈을 뜨고 빛을 몰고/ 밖으로 나가는 새끼들(시 「구더기의 꿈」 전문)

위의 시에서 구더기는 새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윤학의 시는 성스럽고 처절한 고해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를 통한 고해는 또 다른 절망을 가져온다. 시는 안주의 집이 아니라 늘 새로 시작되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속한 장소들은 대부분이 화자를 압박하고 가두어 폐허를 낳는 죽음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무덤, 염전, 저수지, 과수원, 상엿집, 녹슨 함석지붕 등 시인의 기

버려진 다리 위에 - 이윤학(1965~ )

버려진 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가

붉고 매운 고추를 헤쳐 말리고 있다.

한 부대쯤 될까, 군데군데 허옇게 말라버린

고추도 있다. 다리는 축 늘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검은 물 위로,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것처럼

잔뜩 휘어져 있다.

떨어져 나간 난간.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들이

앙상한 뼈들이, 낡은 골조 속에서 터져나와

녹슬어 있다. 굳은살처럼 여기저기

구멍을 때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튀어나온 돌들이 매끄럽게

닳아 있다. 바닥엔 아직도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아득한 구멍 속에서, 거품을 몰고

깊이도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굽은 허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노파가

실눈을 뜨고 일어선다. 가을 해가

버려진 다리 위에 떠 있다
억이 가 닿는 곳 대부분이 폐허의 모습을 띤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집과 길의 방향성이다. 집과 길은 수평으로 몸을 늘여 세계의 끝까지 지평을 넓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무처럼 수직으로 상승하여 하늘의 신성에 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집과 길은 줄기차게 시간을 역류하는 과거의 방향으로 음울하게 흐른다. 태초의 시간부터 세상은 상처로 덮여 있었고 만물에 근원적 죽음이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삶은 상처로 얼룩진 폐허의 집이고 그 폐허를 견디기 위해 그는 시를 쓰며 생을 반추한다. 저물녘 창문에 기대어 더듬더듬 말하려다 말을 감추던 시인의 모습, 그의 눈에 비친 노을은 끔찍하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에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고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독과 사색은 그의 천형이고 운명일 수밖에 없다. 무료하고 적막한 시골 둑길을 혼자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 시인, 그의 눈동자에 비친 황량한 들과 산과 강, 그렇게 시인은 누추한 삶의 저층을 바라보며 독자에게 다가간다.

이윤학은 폐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육신과 영혼에 깃든 상처를 쓸쓸한 서정으로 그려내는 시인이다. 때로는 예민한 감수성의 문장으로 때로는 끔찍하리만치 사실적인 문장으로 삶의 질곡을 드러내고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시인의 진솔한 자기응시,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낳은 결과이리라. 그처럼 나도 자꾸 아픈 곳에 손이 간다. 외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가려진 흉터에 자꾸 눈길이 머문다. 앙상한 뼈만 남은 낡은 다리 위에서 고추를 널고 있는 저 노파, 그녀의 어깨에 얹힌 삶 무게와 굽은 등을 짓누르는 죽음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가을 산천과 들녘이 저토록 아름다운 건 가을이 남긴 상처의 다양한 무늬들 때문 아닐까.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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