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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흑판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20.09.03 17:42:04
  • 최종수정2020.09.03 17:42:04

흑판-정재학(1974~ )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에 부딪혀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 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어가니 반대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팠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정재학은 합리성을 와해시키는 꿈의 상상력, 미니멀리즘의 예민한 감각, 정신분석적 욕망의 언어를 개성적으로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특정 공간과 인물이 등장하고 초현실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물들은 현실의 풍경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신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때 현실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튀어나와 우리의 안정된 인식체계에 낯선 충격을 준다. 그의 시에서 공간은 현실과 초현실의 혼재 공간 또는 융합 공간이고, 시간은 논리적 이성과 불가해한 몽상이 중첩되는 점이지대다. 그의 시에 각각의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들이 등장하고 기억들이 여러 문양이 뒤섞인 알록달록한 아라베스크 직물처럼 처리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에게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휘발되는 무시간의 시간이기에 인과적 필연성보다 불합리한 모순과 우연성이 강조되고 그것이 곧 현대사회의 황폐된 내면임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초현실적 시공간 창출을 통해 시인은 광기와 악몽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고립된 자아, 슬픔에 사로잡힌 인간 개체, 음악과 시의 본원을 탐색한다.

정재학 시의 4원색은 광기, 음악, 동심, 슬픔이며 이것들이 겹쳐지고 혼색되어 신비롭고 충격적인 아라베스크 그림들이 펼쳐진다. 그는 현실의 내부를 직관적으로 꿰뚫어보고 그것을 꿈과 환각의 이미지로 제시하곤 한다. 즉 그의 시는 상징계의 억압과 폭력적 질서를 뚫고나와 상상계의 영역으로 비상하는 새들의 황홀한 음악이라 비유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소리에 대한 미분(微分)의 감각이 섬세한 환상으로 펼쳐진다. 그렇다고 그의 시를 비현실적 몽상의 시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삶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건 삶의 체험들이 재현의 미학이 아닌 반(反)미학의 초현실적 문장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인간과 삶의 외형이 아니라 내부의 비극적 실체들을 주목한다. 그의 시의 어조가 비극적 문채를 띠고 시의 장면들이 차가운 환상으로 처리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그의 시를 접하면서 많은 평자들이 간과하는 점이 언어와 음악의 관계다. 그는 결코 언어를 음악을 백지에 시각화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역으로 그는 시의 언어가 음악 자체가 되기를 꿈꾼다. 시가 음(音) 자체의 리듬과 정서와 에너지를 갖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길 욕망한다. 그래서 초현실적 이미지를 통해 음(音)의 세계를 공감각적 언어로 인화하려는 것이다. 즉 음(音)을 색(色)으로 치환하여 감각적 몸의 언어로 형상화하려는 것이다. 성(聖)과 속(俗), 삶과 죽음이 뒤섞인 자신의 내면을 환상적 이미지와 감각적 선율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음악 마니아로서 오랫동안 시에 음악적 요소들을 접맥시켜 왔으며 그에게 음악은 현실세계와 환상세계를 오가는 날개 달린 배와 같다. 그는 "내 펜이 악기다"라고 강조하면서 음악과 시의 원형인 전통적 무속의 세계, 제의(祭儀)의 세계, 샤먼의 세계로 상상력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무속과 제의의 음악을 통해 역사와 종교의 문제도 성찰한다. 그렇다고 피안의 세계, 기독교적 신의 세계, 불교나 도교의 세계를 운운하는 건 아니다. 그에게 종교는 신성화된 남성과 자음의 영역이 아닌 세속의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모성과 모음 세계의 확장 개념에 가깝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그의 세 번째 시집 『모음들이 쏟아진다』(2014)에 수록된 작품이다. 화자(교사)는 수업 중 칠판에 무언가를 적다가 칠판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새가 날아와 교실 유리창에 부딪힌다. 여기서 칠판은 시공간 이동통로로 화자의 중학생 시절 상처를 환기시키는 매개물이고 유리창은 그로테스크한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오브제 역할을 한다. 이 시공간 이동과정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에 무기력하게 방치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칠판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어 간 화자가 반대편 교실에서 마주한 것은 중학생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모독과 멸시를 당하는 자기 자신이다.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는 모습, 그걸 보고 웃는 아이들 모습, 그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화자는 다시 칠판을 통해 원래의 교실로 되돌아온다. 돌아와 보니 아이들은 없고 텅 빈 교실 유리창엔 검붉은 새의 핏자국만 가득하다.

이처럼 시인은 중학교 교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흑판」 연작을 통해 우리의 교육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한다. 위계적 지시와 절대 복종이라는 과거 교육체제의 폐단, 수직하달 식의 지식전달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응시하여 초현실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이는 시인이 시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거부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의 시 저층에는 우리 사회와 역사, 현실의 모순을 꼬집는 날카로운 독침이 들어 있다. 정재학 시 전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섬세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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