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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2.16 16:15:15
  • 최종수정2023.02.16 16:15:24
오늘도 또 떠나간다.

벌써 몇 년째인지 2월이면 떠나보내기를 하고 있다.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슬픈 일이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마치 내가 졸업하는 것처럼 늘 눈물을 쏟아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떠나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언제나 눈물로 헤어졌다.

2월이 오고 있다.

40년 동안 보냈던 2월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그날도 내일, 모레면 떠나보낼 친구들의 마지막을 정리하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학교에 도착하여 교실에 있는 작은 서류 상자를 열었을 때 깜짝 놀랐다. 480명을 졸업시키려고 준비해 놓은 상장과 졸업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제 퇴근하면서 분명히 여기에 넣어두었는데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깨끗했다. 내가 착각했나 하면서 교무실로 내려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교무실 캐비닛을 열었을 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럴 수가 없다. 가슴이 턱 막혀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문제였다. 상장이야 밤을 새워 쓰면 되겠지만 직인도 찍어야 하고 절차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학년 주임께도 이야기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저기 찾아볼 곳은 모두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새로 쓰는 수밖에 없다. 새로 쓰는 것도 문제는 많다. 인쇄소에 맡겨 따로 인쇄해 온 것이라 여분의 상장이 없다는 것이다. 전체 내용을 붓으로 쓰려면 밤을 새워도 안 될 일이니 걱정이 태산이다.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묘안도 대책도 없다. 난감하여 창문 너머 하늘만 보고 있었다. 드르륵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다. 돌아보니 우리 반 아이 둘이 들어선다. 두 녀석이 간식까지 싸 들고 선생님 혼자 근무하는데 심심할까봐 놀러 왔단다. 마음도 심란한데 크게 반갑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깔깔대는 아이들 옆에서 우거지상을 하고 억지로 태연한 척 영혼 없이 교육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 A가 마치 무엇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선생님,무슨 걱정거리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한다. "응, 뭐 없어진 것이 있어서…" 했더니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내가 넣어둔 곳은 분명 서류 상자 속이었기에 우선 교실 먼저 다 뒤졌지만 쓰다가 버린 몇 장의 상장 외에는 흔적도 없다. 밖에도 찾아보자고 하는 A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따갑고 빽빽한 향나무 밑도 살펴보고 학교의 후미지고 외진 곳은 모두 다 찾아보았다. 상장 비슷한 것도 없었다.

희망 없는 패잔병처럼 운동장을 지나오는데 2월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볼을 때린다. 꺼이꺼이 속울음을 울며 어찌해야 하는지 겁이 났다. 옆에 따라오던 아이들이 화장실도 찾아보자고 한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재래식 화장실을 한 칸 한 칸 문을 열고 속까지 들여다보며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다. 화장실 정화조 속은 얼음이 얼어 넓은 썰매장 같아 냄새는 덜했지만 켜켜이 쌓인 분변들은 각자 다른 색깔 층으로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뒤지고 다니던 친구들이 돌아갔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전달부와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A가 처음 문을 열었던 화장실 그 칸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문을 열었다. 분변이 탑처럼 쌓여 있는 사이로 지저분하고 더러워 구역질이 났지만 허리를 최대한 굽혀 자세히 속을 살펴보았다. 멀찍이 바람에 날린 듯한 깨끗한 종이가 마이산 탑사 같은 똥탑 사이로 열러 장이 보였다. 전달부가 다시 확인을 하더니 이내 화장실 뒤로 가서 사다리를 놓고 화장실 정화조 안으로 내려갔다. 생각한 대로 상장들이 그곳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겨울이라 오물들이 꽁꽁 얼어 고스란히 걷어 가지고 올라왔다. 몇 장은 분변이 묻기도 했지만 대부분 깨끗하여 그대로 쓸 수가 있었다. 순간 팔과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떨려 지탱하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분변 더미에서 꺼낸 것을 꼭 안고 교무실로 왔다. 찬바람에 왜 그리도 교무실이 멀기만 하던지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닦은 후 정말 못 쓰게 된 것만 새로 쓰기로 하고 정리를 했다.

어떤 범인이 든 범인은 꼭 사고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는 설이 있지 않던가. 그날 담임 선생님 혼자 근무해서 심심하다고 놀아주러 왔던 A가 저지른 일이었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는데 찾고 나서 생각해 보니 A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이 그랬다는 힌트였던 것이었다.

본인이 버렸던 그 장소까지 함께 확인했지만 찾지 못했으니 분명 졸업식은 하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돌아갔을 게다. 속으로 얼마나 통쾌했을까? 그 똑똑한 선생님, 무엇이든 다 해결해주던 선생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속으로 조롱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정된 날 졸업식은 진행이 되고 난 또 울면서 보냈다.

A는 본인이 졸업식 날 학업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그런 짓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닌데, 지금도 점수의 노예로 살고 있는 젊은 청소년들이 많이 애처롭다. 인생은 점수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있는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건강한 실천인데 나를 많이 좋아했던A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2월의 찬바람이 휭 지나는 거리 어디선가 졸업식 노래가 들려온다. 떠나는 이 계절이 되면 그때 그 순간이 많이 그립다.

오명옥

교사 정년퇴임

보이스카웃 충북연맹 훈육 위원장

푸른솔문학 신인상 수상

카페문학상 수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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