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신경림의 시에는 민중들의 상처와 애환이 짙게 배어 있다. 신경림은 궁핍하고 혹독했던 독재시대를 살아간 민초들의 슬픔을 민중의 언어로 구체화하고,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아픔들을 전통의 가락으로 풀어낸 시인이다. 민중의 뼈아픈 삶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내면성의 세계 또한 드러난다. 초기의 대표작인 「갈대」에는 시인의 내적 감정이 갈대라는 대상에 섬세하게 이입되어 있다. 갈대의 몸을 흔드는 것이 존재 바깥의 바람이나 달빛이 아닌 제 육신 속의 조용한 울음이었다는 내면인식을 통해 서정의 외연을 확장한다.
언젠가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전문)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이고도 비판적으로 그린 첫 시집 '농무(農舞·1975)' 출간 이후에도 그의 실천적 삶은 계속되지만, 1970대 후반부터 시의 표현과 발화 양식이 다소 바뀐다. 어릴 때 들은 광부들의 노래, 아이들이 뗏목 타고 강을 건널 때 부르던 정선이리랑 같은 노랫가락이 시 속으로 유입되면서 전통 민요풍의 시로 변모한다. 그러나 민요의 형식이 자신과 시를 가두고, 나아가 기존의 시정시가 감각과 이미지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당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각성한 그는 시에 이야기를 도입한다. 인물과 사건의 서사를 끌어들여 당대의 민중들이 처한 고통들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낙타 - 신경림(申庚林 1935∼ )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인은 인간의 존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초기의 내면성 세계로 회귀한다. 현실과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자제하고 유년의 망각된 시간과 기억을 반추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서정의 언어로 풀어낸다.
시 '낙타'는 시집 '낙타(2008)'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관조적 시선과 초월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갈 때 별, 달, 해, 모래밖에 본 것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다시 삶이 주어져 이승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낙타가 되어 오겠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살다가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 하나 등에 태우고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 나직한 고백의 목소리, 내면화된 낮춤의 시선이 울림을 준다. 순수의 세계에 대한 갈망 배후에 숨겨졌을 삶의 질곡과 애환, 생에 서린 슬픔의 곡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은 민중을 대리하는 인물이면서 시인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줄곧 삶과 자아에 대한 초월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객관적 시선 이면에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이 어른거린다. 즉 낙타는 죽음의 세계로의 안내자이면서 환생하는 새 생명체로 시인의 마음 깊이 각인된 슬픔의 초월적 대상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고, 우리는 그 광대한 모래밭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걷는 낙타와 같은 존재다. 시인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순수과정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승에서의 떠남도 저승에서의 회귀도 모두 자연의 순리고 순환인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초월적 통찰,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삶에 대한 갈망, 현실의 고통을 낙타 이미지를 통해 반어적으로 표현한 점 등이 인상적이다. 질곡의 시대를 산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를 떠올리게 하고, 물신과 탐욕으로 물든 우리의 일상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