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조(鳥)자에서 눈을 없애버린 까마귀 오(烏)자로 바꾸어 오감도烏瞰圖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공포의 세상이라는 뜻이 되겠다. 1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를 상징한다. 제주도를 포함한 식민지배 하의 한반도를 상징하며, 최후의 만찬의 식탁에 앉은 유다를 포함한 예수와 열 두 명의 제자가 공포에 떨고 있는 것처럼 식민지 백성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음을 상징하며, 13일의 금요일이라는 불길한 숫자를 상징한다. 아해(兒孩)는 노예계급으로 떨어져 인간의 가치와 자유를 박탁당한 식민지 백성을 상징한다.
한반도 전체가 까만 눈을 가진 속까지 까맣고 불길한 까마귀가 꼬나보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골목이 뚫려 있어도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세상에서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아해들은 달리거나 달리지 않거나 마찬가지이다.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세상이기에 그 무시무시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애써보지만 다시 공포에 갇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포의 정서는 5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식민 하의 모든 백성은 마치 13명이 앉아있는 최후의 만찬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긴장되고 공포스럽다. 식민지 백성은 무섭게 하는 아이와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 13명 중에 유다라는 무서운 아이가 있는데, 나머지 제자들은 누가 무서운 아이인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공포스러운 것처럼, 누가 유다와 같은 밀고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 모두는 더욱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식민지 백성 전체가 소름 돋는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은 마치 어둠이 꽁꽁 얼어버린 것 같다. 밤이 와도 바람에 스치울 별빛조차 사라진 암흑의 세상이다.
사실주의 소설로 쓰면 장편이 될 만한 정서를 몇 줄의 시로 표현한 이상은 과연 현대문학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할 만하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까. 모르거니와 또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지 모른다. 취한 새가 내려다보는 세상을 혹은 병든 새가 내려다보는 세상을 혹은 다리 없는 새가 내려다보는 세상을 그리지 아니할까? 그의 말대로 시대는 늘 과도기이니까.
/ 권희돈 시인
오감도 - 제1호 / 이상(1910-1937)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