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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음악들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85

  • 웹출고시간2019.10.17 13:54:30
  • 최종수정2019.10.17 13:54:30
박정대의 시는 열렬한 고독의 음악이고 신열의 방랑일기다. 그는 몽상가고 사랑과 혁명을 갈구하는 낭만가객이다. 꿈꿀 자유가 없다면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된 액자사진처럼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 꿈꾸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시인이 추억하는 곳은 대부분 모성과 슬픔이 담보되는 공간 즉 머나먼 섬 바다 초원 광야 사막 등 야성의 꿈과 사랑이 보존된 아련한 공간이다. 따라서 그에게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라는 지리적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세상 무수한 곳에 편재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도시의 환멸이 낳는 상처와 흉터가 그로 하여금 고향을 상실한 자의 존재론적 고독과 직면하게 했고 그로 인해 시적 자아들이 세상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고 방황한다는 점이다. 삶이 낳은 환멸이 낭만적 탈주를 낳은 것이다.
그에게 탈주는 몸의 내부세계로의 탈주와 몸 바깥세계로의 탈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몸의 내부세계로 탈주할 때 자아는 몽상과 꿈의 세계, 명상과 예술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의 시에 꿈꾸는 자의 도취된 시선, 명상적 아우라, 사색적 아포리즘 문장들, 외국 작가들과 영화감독과 음악가, 그들의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수시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는 술과 담배연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혼몽의 서사고 도취의 음악이고 촛불의 몽상이다. 이 탈주의 과정에서 시인은 압축의 언어 대신 잉여의 언어, 절제의 문장 대신 과잉의 문장을 택한다. 몸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념과 상상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려 한다.

음악들 - 박정대(1965~ )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탈주가 몸 바깥세계로 펼쳐질 때 시적 자아는 거침없이 대륙을 이동한다. 중국 대륙과 드넓은 몽골 초원을 달리고 사막을 지나 유럽대륙을 거쳐 극지의 얼음지대까지 내달린다. 그렇게 달리면서 그는 초원이 되고 사막이 되고 설원이 되고 비탄의 음악이 된다. 시와 혁명을 꿈꾸는 낭만적 악사(樂士)가 된다. 그만큼 박정대의 시에서 음악의 운동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시가 길고 어지러운데도 매혹적인 건 음악성 때문이다. 이때 음악은 혁명과 고독을 수반하는데, 그에게 혁명은 반체제적 전복이나 이데올로기의 승리가 아니라 감성과 영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사랑과 꿈의 복원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원시림에서 마시는 뜨거운 수프 한 잔, 포르투갈 집시의 노래 한 소절, 머나먼 섬의 파도 한 자락, 사막에서 쓰는 시 한 줄, 사랑 후에 피우는 담배 한 개비 등등이 모두 그에겐 혁명이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닿고자 하는 사랑과 혁명의 세계는 현존이 아니라 부재의 세계로 존재하며 연기될 뿐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점점 비극으로 치닫고 시인은 점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유폐된다. 그의 시가 단일한 이름을 거부하고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자신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이런 비극과의 조우 때문이다.

그의 시 「음악들」을 감상하는 동안 나도 낭만적 몽상의 빠져든다. 바다의 문지방 같은 해안 방파제에 혼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손엔 흑맥주 캔을 들고 물안개 속에 떠있을 머나먼 섬,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를 떠올린다. 그곳은 바다의 눈동자고 고독의 음역(音域)이고 아련한 기억의 유배지다. 파도는 떠나간 여자의 주름진 치마처럼 다가와 내 아픈 발등을 적시고 나는 가슴에 쟁여둔 청춘의 속울음을 담배연기에 실어 허공에 토해낸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고 울면서 나의 너의 우리의 청춘은 저물었으니, 사랑이 일몰기의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 우리의 몸에 남는 것은 혹독한 그리움 그리고 견고한 생(生)이다. 공중을 떠돌며 지상에 안주하지 못하는 어린 눈발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점점 고독한 섬, 고독한 수평선이 되어간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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