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는 시적 화자의 자기위안을 위해 자연을 자동적으로 시에 도입하는 서정시의 관습을 비판하면서 의미와 무의미의 간극, 자아와 사물의 경계, 사물과 언어의 틈을 정밀하게 응시하여 언어 이전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풍경을 그려내려 한다. 풍경을 그리는 시어들의 의미화 작용을 비판적으로 재성찰하여 세계의 표면과 깊이를 동시에 드러내려 한다.
따라서 관념적 사유가 풍경에 뒤섞여들고, 이때의 풍경은 전통 서정시의 풍경과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풍경은 시인의 사적 감상이 배제된 탈속의 경치고, 발견의 눈과 의식이 결합되어 재탄생된 언어적 풍경이다. 그 결과 비는 고독한 음악이 되고,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다시 말해 풍경은 언어로 발화된 야생이고, 야생은 풍경의 음운론적 구성체인 셈이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은유의 지평으로 보고 은유로 세계와 사귀려 한다.
고호 연작은 시인의 이런 인식론과 언어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상적 야생의 풍경이다. 그에게 시는 지상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 침묵의 단독자다. 이 미지의 섬에 가닿기 위해 시인은 끝없이 동경하고 열망하고 자유를 추구한다. 새는 시인의 자유정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영된 소재인데, 단순한 자연의 물적 존재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로서의 새다. 그러니까 새가 자유로이 하늘을 날고 구름 위로 비상하는 것은 하늘, 바람, 구름의 존재 이전에 '난다'라는 언어가 선행하기 때문이다. '난다'라는 언어의 선행성이 새의 자유와 비상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림도 그는 같은 시각으로 본다. 캔버스에 풍경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화가 이전에 팔레트, 붓, 물감 같은 물적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화가의 손은 화필의 일부가 되고, 눈은 기존의 사물이나 풍경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폭약이 된다. 그렇게 그는 관습적 시각과 상투성을 송두리째 벗어던지고 세계와 알몸으로 마주서려 한다. 대상을 감성으로 채색하지 않고 대상의 내면구조를 간파해 그 요체를 풍경의 언어로 재배치하려 한다. 이 여정이 곧 사랑의 발현, 바깥 세계의 풍경이 시인의 육체 내부의 단독적 풍경이 되는 순간들이다. 그러기에 허만하에게 시는 제기된 적 없는 질문에 대한 고독한 대답이고 침묵이다.
/함기석 시인
고흐의 풍경 - 허만하(許萬夏 1932∼)
꿈을 비웃으라,
피가 흐르는
나의 배경에서는
까마귀가 날고 있다.
유황처럼 끓고 있는
보리밭 위를
검은 덩어리들이
낮게 낮게 날고 있다.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서도
하늘은 바다처럼
일렁이어야 하고
언어는 피 흘리며
보리밭처럼 끓지 않으면
안 된다.
격렬한 일몰에
나의 두 눈은
불타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몸부림치는
누런 보리밭 위를
이 숨막히는 쓸쓸함 위를
까마귀 떼들이 낮게 낮게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