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초기 시는 물신화된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유머와 해학, 재치 있는 언어감각, 가볍고 장난스런 말놀이 등으로 현대사회의 병든 치부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1시집 『우울氏의 一日』(1990)에서 시인은 소통 부재의 현실 때문에 밀폐된 공간 속에 은거하는 자아를 등장시켜 현실을 희롱하고, 2시집 『자본주의의 약속』(1993)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해학적으로 그려내어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폭로한다.
세계와 현실에 대한 시인의 회의적 태도는 3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1996)부터 변모한다. 이전 시들이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풍자, 세계와 대립의 각을 세웠다면 3시집부터는 대상과의 화해와 합일을 지향한다. 세계와 자아의 갈등이 아니라 일체화, 대립이 아니라 동일화를 욕망한다. 문명비평과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존재의 안쪽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지독한 사랑의 길을 거친 자의 고통이 스미어 있는 시집인 셈이다.
이후 4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을 통해 그는 서정의 세계로 더욱 깊게 뿌리를 뻗는다. 강화도 생활이 토대가 된 강화도 생활보고서 성격의 시집인데 부드럽고 아름다운 서정의 온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강화도 동막리 사람들의 신산한 삶,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개펄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울림을 준다. 5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2013) 역시 부드러운 서정의 힘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며 시인은 타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삶의 신산한 경험들이 낳은 실존론적 사유가 펼쳐지며 따뜻한 공감과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1962~ )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