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속에 숨은 소녀의 모습은 초현실적 풍경이다. 시인은 지금 가을의 탐스런 사과밭을 바라보고 있다. 가시 돋친 쇠줄 울타리를 타고 넘어온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잘 익은 사과를 보면서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한 입 깨물면 금방이라도 꽃다발이 되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소녀, 사과의 씨방에 박혀 있을 생명의 씨앗을 떠올린다. 시인의 동화적 상상력이 낳은 환상인데 중요한 것은 환상의 발아 토대가 비극적 현실, 전쟁이 낳은 참혹한 공포라는 점이다. 이 시는 소녀들이 사과 속으로 숨은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시의 전개양상이 달라진다. 전시상황에서냐 평상시냐에 따라 시의 긴장감은 확연히 달라진다. 외관상 시인이 시월의 사과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없는 소녀를 연상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상황을 고려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평온한 가을의 사과밭 풍경 뒤에 몸서리치는 전쟁의 시간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심리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중첩되면서 유년의 시간들이 사과밭으로 밀물처럼 밀려온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위험한 마을에서 사과밭으로 도망치는 소녀가 그려진다. 이 도주의 풍경을 시인은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로 은폐하고 있지만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필사적 탈주이기도 하다. 또한 시월의 잘 익은 사과가 드러내는 붉은색은 총탄에 희생된 소녀들의 주검의 빛깔과 중첩된다. 시인은 왜 가을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비극적 시간들을 중첩시켜 초현실적 환상을 낳는 걸까. 전쟁의 후유증이 그만큼 크고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봉건 시에 구현된 초현실성은 정신적 초월이 아니라 몸의 절박한 고백이자 고통의 역설적 발현인 셈이다.
전봉건은 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으로 월남 이후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앓았으며, 6·25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그는 위생병으로 참전했다가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당하여 제대했다. 전쟁은 그에게 죽음과 파괴, 상처와 고통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생명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 시각을 열어주었고 시 언어의 심미적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벼리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시를 통해 개인적 아픔뿐만이 아니라 이산가족의 고통을 노래하고 겨레의 비원(悲願)을 명징하게 형상화했다. 전쟁의 비극적 기억들을 과거의 시점이 아닌 생생한 현재의 목소리로 재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전쟁은 망각된 과거가 아니라 괴롭게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 사건이었다.
시월의 소녀 / 전봉건(全鳳健 1928~1988)

소녀는
사과 속에
숨어 있다.
순이는 달음박질쳐가서
숨었고
은하는 사뿐히 걸어가서 숨었다.
선화는 어물어물 새도 몰래 숨었고
춘하는 꽃병 곁에 잠자다가 숨었다.
저 무서운 총알이 오고 가던
저 사과나무 밭의 가시 돋친 쇠줄 울타리 타고 넘은
저 사과나무 가지에도
주렁주렁 매어달린 탐스런 사과.
그럼
사과나무 밭으로 가 볼까나.
제일 빛나게 익은 큰 것을 따야지
내 사랑하는 소녀가 숨은 사과.
한입 깨물면
내 소녀는 꽃다발 되어 뛰쳐나올 거다.
새까만 사과씨는 보석처럼 굴러서
흙 속에 숨을 거다.
시월의
소녀는
사과 속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