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은 흔히 박목월, 박두진과 더불어 청록파(靑鹿派)로 불리는데 청록파의 시풍은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배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고전미의 회복과 순수서정의 회복으로 요약된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읊은 박두진이나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 삶을 민요풍으로 노래한 박목월과 달리 조지훈은 민족의 고유문화와 불교적 소재들을 관조와 선적 사유로 풀어냈다.
초기에 그는 주로 전통에의 향수와 불교적 선(禪)의 서정을 담았고, 6·25 전쟁 이후에는 역사적 현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시기든 그의 시의 바탕은 자연이다. 그의 시 속에서 자연은 순수한 자연 자체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통문화나 민족정서로 나타나기도 하고, 불교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시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자아의 문제와 결합해서는 역사와 민족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즉 시인의 자연에 대한 응시는 곧 자아에 대한 응시고, 자아에 대한 응시는 개인에서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응시와 탐색으로 이어지고, 다시 민족과 역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조지훈에게 자연은 자아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근원적 질서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승무(僧舞)'는 조지훈의 대표작 중 하나다. 승무는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추는 민속춤이다. 정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시인은 법고 소리를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표현되지 않은 침묵의 소리에 리듬을 맞추어 춤추는 이의 몸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다. 만물이 숨을 죽인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작 하나하나가 극도로 예민하면서도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이다.
승무(僧舞) - 조지훈(趙芝薰 1920~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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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지는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腦)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