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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마징가 계보학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20.02.13 14:42:27
  • 최종수정2020.02.13 14:42:27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權赫雄 1967~ )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우리집에 밤마다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면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 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 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과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충북일보] 권혁웅은 현대사회의 일상을 희화화하여 해학의 문장으로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에게 세속의 일상은 시의 가장 일차적인 현장이며 핵심적 육체다. 그러기에 그는 주관적 관념이나 몽상으로 삶에 접근하지 않는다. 현실의 비루한 인간들, 권태로운 사건들을 시로 풀어내면서 현실이 은폐한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의 시는 풍자와 유머, 신화와 환유가 뒤섞인 실험적 비빔밥 텍스트로 코믹한 인물과 정황을 통해 삶의 슬픔과 허위를 드러낸다. 켄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 늑대인간, 기린, 이무기, 유니콘 등 신화 속의 상상 동물이나 역사 속의 이야기를 펼칠 때도 신화나 역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기 위함이다. 현실을 비틀거나 균열시켜 현실의 틈을 엿보고 현실의 외관이 가린 그로테스크함과 빈곤함을 직시하기 위함이다.

그의 시는 대체로 세속의 번잡하고 코믹한 사건들로 채워진다. 재밌고 웃긴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삶의 애환을 담고 있는 코믹 난센스 장면들은 역설적으로 삶의 권태와 텅 빈 허무를 부각시킨다. 따라서 코믹한 장면들 자체보다 그런 장면을 가능케 하는 일상의 배후들이 중요해진다. 그의 시에 반어와 역설, 유머와 모순어법 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중층적 시선과 겹의 구조 때문이다. 주목되는 점은 일상의 사실들을 병렬하는 방식이다. 그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점층적으로 확장하는 수직적 전개방식을 취하지 않고 수평적 병렬방식을 취한다. 사실과 사실을 토막토막 끊어서 시간의 계기적 흐름을 휘발시키고 서로 다른 시간들이 수평적으로 몸을 섞게 한다. 이런 시간의 혼용과 사건의 무순열적 나열 때문에 시 속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 확장된다. 즉 그의 시에 나타나는 다양한 병렬배치 기교들은 시간에 대한 시인의 순환인식과 삶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낳는 방법론이다. 현실의 실상과 치부를 드러내는 시인 특유의 발현 형식, 관계 탐구 방법인 것이다.

첫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2001)가 비애의 정서를 탄탄한 묘사력으로 그려낸 시집이라면,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2005)은 유년의 만화영화나 애로영화 등을 활용하여 펼친 기억의 아라베스크 퍼즐이다. 농도 짙은 유머와 위트의 발현 이면에 생에 서린 비애와 공포와 허무가 안개처럼 깔려 있다. 1970~80년대의 소시민의 지배문화인 만화영화(마징가 시리즈, 독수리 오형제 등)와 성인잡지(선데이 서울, 애마부인 등)를 주요 소재로 삼아 일상의 애환과 폭력을 코믹하게 풀어낸다. 오늘 소개하는 시 「마징가 계보학」 또한 지나간 시대의 일상과 사람살이의 애환을 코믹 난센스 코드로 재밌게 풀어낸 작품이다. 기운 센 천하장사로 묘사된 술주정뱅이 남자와 날마다 그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 그리고 옆집의 오방떡 파는 정의파 사내 등이 등장하여 도시 소시민의 일상사, 가부장적 남성 권력과 공포, 흉터로 얼룩진 여성의 암울한 삶을 사실적으로 부각시킨다. 현실에 대한 사실적 규명과 해석이 애니메이션 감각, 코믹 카툰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권혁웅은 시 작업과 함께 비평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우리의 비평이 주제론과 분류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제를 담는 시인의 의식만 중요하게 취급되고 주제를 담아내는 언어형식이 홀대받는 현실, 작품 자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뒷전이고 분류를 앞세우는 권위적 비평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시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주제나 이념의 분류 이전에 시 자체에 내재된 감각, 이미지, 리듬, 형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균형감 있게 평가해야 한다. 시의 역사는 주제의 변화 역사이기도 하지만 언어, 감각, 형식의 변화 역사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시와 비평 사이의 길항의 힘, 종존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할 시점이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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