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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무더운 기운이 우거진 숲까지 뚫고 내려오나 보다. 걸음을 멈추어도 삐질삐질 땀이 난다. 나만 그런가 둘러봐도 모두 휴대폰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헉헉댄다. 부채라도 들고나올 걸 하지만 떠나간 버스에 손 흔들기다. 예전에는 여름에 사람들 손에 가장 많이 들려 있던 사물이 부채다. 그러나 선풍기나 에어컨이 등장하면서 부채는 이제 현대인의 사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부채는 내게 여전히 매력 있는 사물이다.

부채라는 사물이 내 지각에 환기하는 감성은 에로스에 가깝다. 이때의 에로스는 친밀한 접촉의 추억으로 내 마음을 적셔온다. 한여름 대청마루에 누워 할머니가 부쳐주시던 부채 바람을시작으로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우아하게 사용했던 접 부채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 잊을까. 부채는 내게 그리움과 추억의 사물이다. 지금도 애용하고 있으며 꼭 챙겨놓는 사물 중 하나다. 부채라는 사물 자체가 주는 부드러움을 몸이 잊지 못해서다. 선풍기의 인공적인 바람과 달리 얼굴을 퉁명스럽게 가격하지 않아서 좋고 필요한 때 어디에서나 내가 불러올 수 있는 자발적 바람이라 좋다.

부채는 '부치는 채'가 줄어든 말이다. 한자로는 선자(扇子)라고 하며 방구부채와 접 부채로 크게 나뉜다. 방구부채는 납작하고 접히지 않는 부채고 접 부채는 말 그대로 폈다 접었다 하는 것으로 쥘 부채라고도 부른다. 둘 다 부채의 원리는 같지만,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붙여졌다.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방구부채가 인정 많고 푸근한 아주머니 이미지라면 접 부채는 단아한 아씨 이미지로 다가온다. 특히 접부채에 대한 나의 에로스적 감성은 어느 날 읽은 소설 속 한 여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부쩍 애정이 깊어졌다. 질곡의 시간 속에서 그녀 자신이 희망을 향해 일으켰던 자발성에 의미를 뒀기 때문이다

오래전 여름이었다. 왜 그런 감성이 솟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이얀 눈 위에 검은 나비가 앉아 있었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거짓말처럼 더위를 잊었던 것 같다. 이병주 작가의 '쥘부채'는 사랑과 한이 서린 한 여인의 이야기다. 주인공 동식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부채 하나를 줍는다. 길이 7㎝ 두께 2㎝가 조금 넘는 손아귀에 꼭 들어오는 쥘부채다. 이 부채는 칫솔이 주재료였고 검은 녹색의 나비와 나리꽃이 수 놓아졌으며 나비엔 ㄱㄷㄱ가 노란 나리꽃에는 ㅅㅁㅅ이란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렇게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의 주인을 찾아 나선 동식은 이 부채가 20년 여자장기수의 것이라는 걸 수소문 끝에 알게 된다. 이름은 신명숙이고 이미 사형된 강덕기와 연인 사이였다는 것. 이 부채는 당신은 죽어서 나비가 되고 나는 꽃이 되리라는 뜻으로 신명숙이 만든 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방 3년 전인 어제, 그녀가 죽었음을 알게 된다. 잘못 빠진 사회주의 사상 때문에 비운의 여정을 걷게 된 두 남녀는 이승에서는 불행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할 만큼 울림이 컸던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했던 한 영혼이 쥘부채에 오롯이 새겨졌다. 그건 단순이 한낱 부채가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바람에 휩쓸려 불행의 길을 걸어야했던 두 젊은이의 아픔이었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여인의 희망이요 절절한 원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소리 바람의 소리다. 불행했던 사랑을 신명숙은 스스로 희망으로 일으켰고 재회하리라는 원을 부채에 곱게 수놓았다.

나를 향해 내가 만드는 바람. 부채는 스스로 일으키는 바람이다. 스스로 바람을 만드는 일의 의미를 생각한다. 바람은 내 자발성이 만든 운동의 결과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삶 자체가 대부분 내가 일으키는 자발성으로 인해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진행되는 것일 거라는 생각이다.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움직이면 비로소 생겨나는 허공의 각성 같은 것, 부채 바람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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