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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손녀의 장난감을 정리하다 뜬금없이 옛날 생각이 난다. 마당이 놀이터였고 흙과 모래, 사금파리가 장난감이었던 어린 시절. 그걸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거나 두꺼비집을 지었고 조금 커서는 인형이나 고무줄을 가지고 놀았다. 요즘 아이들이야 장난감이 좀 많은가. 그중에서도 아이 있는 가정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게 레고 장난감이다. 여러 개의 작은 레고들을 붙이고 뗐다를 반복하면서 종국엔 뭔가의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레고는 손녀의 최애(最愛) 장난감이었다. 눈만 뜨면 레고 놀이에 빠졌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레고 상자가 뒷방으로 밀려나 있다. 놀이가 바뀐 것이다. 가짜 돈을 가지고 여행하는 놀이인데 노는 시간도 짧고 단순하다. 여행지를 상상한다기보다는 별 수 없이 더하고 빼고 남은 돈이 얼마인가에 성패가 갈린다. 이 놀이는 머리를 돌려야 하는 놀이다 보니 돈돈하다 끝났다. 우주선도 만들고 동물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던 레고에 비하면 돈놀이는 다른 사물을 만들 수가 없어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레고의 인기비결이 여기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손녀와 같이 레고 놀이할 때를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레고를 가지고 놀 때면 아이와 나는 이야기를 하듯 종알거리기도 하고 벽돌을 쌓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리해서 다른 모양으로 꾸몄었다. 아이와 꼼지락거리던 레고 상자를 열어 레고들을 결합해 본다. 가장 단순한 집을 만든다. 어떤 집을 지을까 상상을 하며 벽돌을 결합하고 분리한다. 우선 밑에 기다랗고 큰 레고 위에 같은 크기의 작은 벽돌들을 쌓아 올린다. 정원에 꽃과 나무를 세우고 나니 하나의 멋진 정원과 별장이 완성됐다. 작은 레고들이 서로를 끌어안아 견고한 결합력에 의해 우주적 '필연'을 형성한 셈이다.

1832년 덴마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이래 세계 어린이들의 성장필수품이 된 레고는 레그 고트(leg godt)란 말의 줄임말로 덴마크 말로 '잘 놀다'라는 뜻이다. 레고는 처음부터 벽돌 놀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레고는 벽돌쌓기 즉 벽돌 결합 놀이다. 목공소에서 한 목수에 의해 발명됐을 당시에는 평범한 나무 장난감이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과 같은 플라스틱 벽돌로 진화했다. 벽돌은 의외로 극히 한정된 몇 개의 색깔들과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합과 분리. 집을 만들건 탑을 쌓건 호랑이를 만들건 같은 재료이며 몇 개의 한정된 색의 벽돌로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계는 커다란 개별적 사물들의 커다란 사물 모양의 덩어리가 아니라 몇 개의 기본 요소로 환원될 수 있는 아주 부분적이고 작은 요소들의 결합이란 걸 은연 중에 알려 주는 거다. 내 얕은 과학 지식을 떠 올려봐도 표면적으로 보이는 세상의 무수한 이름들은 겨우 100여 개 정도의 기본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 들었다.

동일한 종류의 레고 벽돌들을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아이들은 자동차와 우주선과 공룡이 실은 같은 것들로 이뤄진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저도 모르게 알게 된다. 여기에서 사물들은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구성요소들의 다른 배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놀이에서 겪는 가장 내밀한 경험은 세상의 무수한 차이들은 표면일 뿐이며 실은 같은 것들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지를 장난감을 통해 알아 간다는 점일 것이다.

놀며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 그건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고픈 삶의 본질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린 '논다'라는 단어 자체에서 조차 일을 개입시키려 하는 건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유한한 생이다. 더구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지금 이 세상에 현존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의 끝에서 후회하는 게 '잘 놀걸'이라 한단다. 그만큼 잘 논다는 건 중요하다. 레고 상자를 들여놓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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