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홍성란

수필가

늘 그렇듯, 설거지를 마치면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습관처럼 무심히 살림살이들을 둘러본다. 모두 오래 된 것들이지만 세월만큼 정이든 물건들이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는 10년. 그간 변화가 있었다. 아이 둘이 결혼을 해서 나갔다. 모두 이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을 먹고 학교와 직장을 다녔다. 이제 부엌엔 그릇과 그릇소리, 물소리, 가스 켜는 소리, 음식 끓는 소리가 깔깔대던 아이들 대신 혼성 합창처럼 들어서 있다.

요즘이야 부엌을 주방이라 부르지만 아직도 나는 주방이란 명칭보다 부엌이라 말하기 좋아하고 즐겨 사용한다. 부엌, 이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 내게 부엌은 나의 제단. 꽃무늬 영대를 두른 나는 이곳을 지휘하는 여사제이기도 하다. 그리 화려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나의 제단엔 아궁이 불 대신 가스레인지가 있고 누르면 쏟아지는 수도라는 문명의 샘이 있다. 그리고 싱크대에는 매일 쓰게 되는 살림 도구와 반질반질한 그릇들이 단정한 자세로 포개 있다. 이 모두 나의 제단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랑스런 제물들이다.

저녁을 짓는다. 오늘의 제물은 돼지고기와 약간의 푸성귀. 시원스레 트인 북쪽 창, 저녁놀아래 제물을 손질한다. 흐르는 물에 푸성귀와 고기를 깨끗하게 씻고 두툼한 냄비에 고기를 앉힌다. 고기가 익는 동안 파도 송송 나물도 조물조물 무쳐야지. 알곡은 압력솥에서 익혀지고 파란 불이 냄비바닥을 뜨겁게 달군다. 이제 물과 불과 도마와 칼의 4부 혼성합창이 울려 퍼질 것이다.

이윽고 쉭쉭대며 김을 내뿜는 압력솥의 볼레로가 경쾌한 소리로 합창의 서막을 연다. 이어 냄비와 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가 혼성 코러스로 분위기를 돋우면 성가는 절정에 이른다. 소리는 고요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다. 이제 접시와 사발들의 화려한 마주르카만 남았다. 오오 성스러운 나의 제단에 설설 끓는 국과 찌개들이 파르티타의 맛처럼 깊어간다. 삶의 싱싱한 비린내와 비루함의 비밀스런 저녁밥. 누군들 일용할 양식 앞에서 흠향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사의 십자 성호가 그어지면 말없는 혀는 아삭거리는 푸성귀들의 음표를 젓가락으로 집어 맛을 음미하고 숟가락 위에는 밥 한술의 우주가 올려 진다.

부엌, 이곳은 아득할 것도 없는 나의 지평선, 나만의 은밀한 공간. 맵고 쓰리고 짜고 시큼한 나의 삶의 냄새와 자취들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한 밤중, 속이 헛헛해지고 마음이 제 모습을 놓친 듯 하면 무의식 속에서 부엌으로 간다. 세 아이가 대학 시험 보기 전 날, 삶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끙끙대는 날 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던가.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한 밤 중 괜스레 그릇도 만져보고 조심스레 찻잔도 들어보았지. 그래도 눅지 않으면 냉장고를 여닫았고. 그래도 가라않지 않으면 부엌의 창을 열고 내리는 눈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눈발은 우주의 유혹과 허공에게서 어지러웠던 나를 세워 방으로 안내한다. 내가 나온 후 부엌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들의 내적 질서를 은은히 잡아가며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혼돈의 회오리바람에도 묵묵히 스스로를 정리하며 차분해지는 이 공간에서 날마다 정성어린 제물은 올려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늦은 저녁.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어떻게 우리가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세상 어느 권력과 명예보다도 위대한 궁전 앞에서의 엄숙한 기도는 날마다 이어져 왔다. 어쩌면 이 궁전의 기도가 있었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먹는다는 건 생명을 살리는 길이요 살아있다는 증거. 이곳에서 식구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때론 삶기도 하고 찌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생각할수록 삶과 죽음, 우주의 신비가 함께 하는 '부엌의 칸타타'는 그래서 거룩하고 성스럽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