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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이렇게 감미롭고 명예롭고 숭고한 것들이 전부 거듭해서 흰색과 관련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색의 가장 깊은 관념 속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뭔가가 도사려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피의 붉은 색보다 더 많은 공포를 영혼에 안겨준다'. 허먼 멜빌의 작품 〈모비딕〉의 한 구절이다. 화자가 모비딕이라는 고래를 왜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에 화자(話者)는 흰 고래가 단지 흰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본인에게 공포를 안겨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흰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공포를 안겨준다니. 내게도 흰색은 그냥 흰색이 아니다. 그만큼 겨울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색이 흰색이다. 어린 시절 기억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냥 흰색에 그치지 않는 대상이 흰 눈(雪)과 흰 손수건이다. 먼저 흰 눈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눈은 아주 단순하고 깨끗하다. 여기엔 유년의 기억 속의 흰색이 내게 건넸던 신성함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폭설은커녕 눈다운 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 때는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겨울방학이면 어김없이 달려갔던 곳이 시골 외가댁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며 십 리가 넘는 눈길을 걸었다. 옛 시골 풍경이 그랬듯 조용하고 고요하다. 내 귀엔 눈 내리는 소리와 눈 밟는 내 발소리뿐. 어쩌다 동네 강아지 소리만 들린다. 좌우를 둘러보고 위를 봐도 아래를 내려다 봐도 천지가 하얀 빛으로 하얀 도정 속에 어린 내가 있었다. 신이 세상에 축복을 내린 듯 하얀 그 자체로서 깨끗하고 순결해 보이던 눈. 마치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밝아보였던 눈이었다. 그러던 눈이 점점 눈발로 변하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나는 갑자기 눈(雪)이 무섭고 두려웠다. 아니 흰색이 무서웠다. 그날 흰색은 자연에 대한 공포와 눈 속에 어떤 신이 계신 듯한 외경심이 들게 했다.

또 하나, 흰색에 대한 강렬함은 초등학교 입학식 날 가슴에 달았던 하얀 손수건에도 있다. 숯다리미로 사각의 하얀 손수건을 정성껏 다려 자식의 가슴에 달아주며 환하게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이며 이제 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약간의 기대감으로 학교에 갔던 일. 서로의 가슴에 달려있는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며 어색함을 달랬던 기억. 그 기억 속에 수많은 손수건이 있었고 중심에 하얀색이 있다. 그날 낯선 학교라는 공간, 운동장, 낯선 친구들과 헤어지고도 나의 뇌리에는 수많은 손수건 보다 수많은 하얀색이 어른거렸다. 흰색은 왠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땐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얀 손수건은 내게 인생의 걸음마를 위한 훈련이 시작되었음을 표징하는 사물의 신호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흰 눈과 흰 손수건. 왜 나는 이토록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걸까. 심리학자와 색채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색에 대한 심리적 영향을 제일 먼저 촉진하는 요인이 우리의 일상인 음식, 옷, 동물, 건축, 자연, 심지어 인간의 피부에서도 연상이 시작된단다. 그리하여 연상된 요인에 심리적 반응이 이뤄지며 다음으로 근원적 경험으로 이어진다고. 근원적 경험에서 흰색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상징성을 부여하게 된다고 한다. 이때 상징성은 그 때 상황과 분위기 사회상 역사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단다. 다시 말하면 색(色)이 색(色)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도 내게 흰색은 1월을 상징한다. 1이란 숫자는 모든 숫자의 시작이다. 시작으로서의 흰색은 단순함과 소박함에 있을 테다. 작년의 무수한 어긋남이 있었다 해도 백지로서의 1월엔 시작함으로 인한 희망과 설렘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할 일이다. 희망과 설렘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비움엔 채움이 있다는 깨달음을 줄 테니. 그런 의미에서 흰색은 우리 삶에서 외경스런, 혹은 신성함을 품고 있는 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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