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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한 무리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떨어진다. 핵전쟁이 일어난 가운데 비행기로 후송되던 영국 소년들이 태평양 어느 섬에 불시착한 것이다. 조종사는 죽고 살아남은 건 겨우 5-12세밖에 안 된 소년들뿐이다. 아이들에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청천벽력 같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 집도 절도 없는 야만 지대였으니 그들의 사고를 세상이 알기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언제까지 이 섬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무인도에 떨어진 소년들을 등장시켜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비춘다. 문명에 익숙했던 소년들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하고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천진하고 연약하며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이라 마냥 울고만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들도 하나의 인간이기에 생존본능이 발동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행동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소년들에게서 내면화된 문명의 가치가 어느 정도의 견고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을 던진다.

위험한 상황을 인식한 소년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빨리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데 있었다. 그들은 '랠프'라는 소년을 리더로 삼아 산꼭대기에 횃불을 올려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치고 비문명 생활에 지친 소년들은 불안하다. 이때 횃불보다 먹는 걸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다부진 체격의 '잭'의 의견에 다수의 아이들이 사냥에 따라 나선다. 소년들은 사냥을 하면서 피에 흥분하고 만족해하며 횃불 약속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는다. 즉 구제의 가망이 멀어지고 두려움이 커짐에 따라 그들의 타락도 심화해 간 것이다. 이때부터 리더의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결국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은 악을 드러내고 지배욕이 발동되고 종내는 횃불을 지켜야 우리가 구출될 수 있다는 랠프와 먼저 배가 불러야 불도 지킬 수 있다는 두 주장이 갈라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아이들에게도 인간 본성에 잠재했던 악이 폭력과 살인, 지배욕으로 나타나 약속 파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됨을 알게 된다. 문명의 가치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 생각게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잭'이 이끄는 사냥은 중요한 의미로 읽힌다. 사냥은 어떤 이유에서든 한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다. 사냥을 거듭할수록 소년들은 피에 익숙해지고 동료 살인 폭력으로 번지고 스스로 야만인으로 타락한다. 작가는 이런 타락하는 소년들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어둠으로 파악하고 있다. 더불어 소년들에게 두 개의 잠재적 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소년들의 천진성과 인간 본성에 숨어 있는 악이다. 그 상징을 잭과 랠프로 표현했다. 양심적이고 동료를 배려하고 따듯하게 생각하는 '랠프'를 선의 이미지로 나타냈는가 하면 '잭'은 검은 의상에서부터 사냥이나 폭력 살인, 권력욕 지배욕에 이르기까지 어둠과 악을 대변하는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또 나머지 사이먼이나 로저 근시소년돼지 쌍둥이 등에서 사회의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파리대왕'은 소년들의 모습에서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이는 인간 본성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순진한 아이들에게는 악이 없을거라는, 설마 살인까지라는 예상을 뒤엎은 소년범죄 사건이다. 요즘 소년범죄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일고 있다. 문제는 아무리 사회적 약속과 문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약속했다 해도 강한 힘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그 가치와 약속이 지켜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며 이 책의 모랄이다. 새삼 아이에게서 어른을 본다는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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