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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필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달을 보고 있으면 왠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이유가 없다. 그냥 기분이 좋다. 그만큼 달은 변함없이 내게 '좋다'는 느낌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들이 얼마나 될까. 작년 리움미술관에서 보았던 조선백자 '군자지향전展'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달을 닮은 둥근 백자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서성였다.

번쩍 눈에 띌 정도로 독특하거나 화려해서 시선을 끌었던 게 아니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 있거나 특이한 모양은 더욱 아니었다. 아니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얀색인 듯 조금은 아닌 듯 묘한 색.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묘한 색이 달빛을 연상케 하면서 넋 놓고 바라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마치 잊고 살았던 어떤 소중한 것을 만난 듯 한참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도자기는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양에 달 표면 같은 얼룩이 더해진 백자였다. 게다가 달 표면 같은 얼룩을 보는 순간 나는 달을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을 닮은, 인생을 닮은 저 둥근 그러나 시름으로 가득 찬 인생 같은 얼룩. 도자기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냥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백자 명찰엔 달항아리라는 호 같은 부제가 달려 있었다. 둥근 달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던 김환기 화백이 달항아리라는 작품으로 영감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달과 항아리, 얼마나 정감 있는 단어였던가. 달뜨는 밤이면 하염없이 창가에서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이 있다. 일부러 보려고 본 게 아니다. 그냥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거기 달이 있었다. 어쩌다거나 일부러 나오는 게 아닌 그 시간이 되면 떠오르는 달은 내게 무덤덤하지만 신비로움처럼, 더러는 동무처럼 다정한 대상이었다. 아무리 내가 조잘대도 때로 구시렁대도 달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항아리 또한 달 못지않게 묵묵하니 우리와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항아리가 백자니 청자니 분청사기니 하는 하나의 예술로 승화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 과정을 이 전시가 오롯이 펼쳐 보인 것. 사실 그날 대규모 백자展에는 조선의 대표적 백자들을 위시해서 청화백자에서 왕실과 사대부의 위엄을, 청화 동화 백자에서 연료 변화에 대한 해학을 마지막 4부는 순백자의 백색에 대한 본질을 다룬 조상들의 뛰어난 예술감과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아무 무늬도 없이 그냥 순수한 백자였다. 돌아오면서 백자 앞에 서 있던 나를 떠올렸다. 왜 나는 그토록 항아리 앞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 항아리에서 달과 바람을,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달과 바람, 하늘을 당연이 있어 온 것으로 지나쳐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달이 자연이듯 공기이듯 내 곁에 있었지만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봤던 우매함이여. 그로 인해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상상과 꿈속을 방황하며 살았던 어떤 시기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좋다는 것, 순수한 감정을 자주 느낀다는 건, 아주 소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행복의 전주이리라.

그냥 좋다는 건 감정이다. 그건 아무 조건 없이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 느낌이다. 때문에 '달'은 내게 도자기를 통해 즐거움을 유발하는 스위치 역할을 한 것이다. 어찌 보면 행복의 본원은 좋다는 감정의 발로에서 시작된 관념이 아닌 경험에서 느끼는 편안함 또는 그냥 '좋음'이 아닐까. 정말 오랜만에 '달'이 내게로 돌아온 것 같다. 나보고 고마워하라고 돌아온 것도, 나 좋으라고 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달은 항아리로 달로 예술로 다시 내 마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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