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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0.06.04 15:33:25
  • 최종수정2020.06.04 15:33:25

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카톡, 카톡, 새가 운다. 카톡새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폰을 열었다. 온통 꽃 세상이다. 목련, 진달래, 벚꽃, 복사꽃, 오전 내 전자 새가 울어대며 날라다준 선물들이다. 봄은 봄인가보다. 이럴 때 나의 그대들과 함께 숲길을 걸을 수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봄꽃 같을까. 산과 들은 온통 꽃 세상이겠거늘, 나는 아직 집에 있어야 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오늘 같은 봄날에는 어떤 이유이든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말이다. 가까운 우암산도 좋고 양성산도 좋으련만. 수통하나에 그대들과 나누어 먹을 마른 빵 두어 조각이면 족하리오만. 귀신보다 무서운 코로나19가 발목을 잡는다.

어차피 이번 봄에는 꿈속에서조차 갈 곳이 없잖은가. 그러니 그리운 것들을 그대로 두고 그리워하는 것이 더 봄답겠다. 찰랑찰랑 함께 걷던 그대들도, 낭창낭창 울어댈 새소리들도, 그리워만 하는 것이 더 나답겠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구죽주한 바이러스 두려움 같은 건 박차고 흩어 놓으면 될 것을, 가만가만 이 봄을 흔들어 바람에 날려버리면 될 것을, 숨어있다고 안전한 것도 아닌 것을, 너무 비겁한 건 아닐까. 다시 마음을 고친다. 가고 싶어 애타는 동안 꽃이 다 벌어지더라도, 말라서 다 떨어지더라도, 그리운 대로 두는 것이 맞겠다, 하며 머그잔에 커피를 탔다.

머그잔에 봄이 내렸다. 거실이 화사하다. 그림인가 글씨인가. 분간 못할 머그잔 서화를 감상하며 봄을 마신다. 이 작은 찻잔에 어찌 요리 섬세하게 표현했을까. 뭉툭하니 생긴 찻잔 표면에 진갈색 홍매가지가 아치형으로 드리웠다. 흐르다 멈칫, 흐르다 멈칫, 리듬감을 주며 내리달리다 드리운 가지 사이로 점점이 핀 붉은 꽃송이들이 사람 맘을 보통 심란하게 하질 않는다. 붓끝으로 찍어 마무리한 작은 점하나까지 작가의 혼이 느껴진다. 흰 바탕에 진갈색과 붉음, 색상 또한 황금 비율이다.

머그잔 꽃가지가 기억의 문을 연다. 아련한 시절 봄날로 달려간다. 어언 팔순을 넘긴 큰언니에게 홍매꽃잎처럼 붉게 멍든 가슴을 삭이던 봄날이 있었다. 나와 스무 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큰언니를 서울언니라고 불렀다. 그해 봄날, 서울언니가 집으로 내려왔다. 봄날 내내 언니는 안방 뒷문을 열어 놓고 뒤란 샘가에 있는 홍매나무를 보았다. 큰언니는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했던 것이다. "세월보다 좋은 약은 없는 겨…."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가만가만한 어조로 던지시곤 했다. 철없던 나는 언니에게서 나는 분 냄새가 좋아 언니주변을 맴돌았다. 꽃잎이 날려 샘으로 들어가 빙빙 돌다가 넘치는 물결 따라 고랑을 타고 수채로 떠갔다. "언니 손톱하고 색이 똑 같다." 고랑으로 떠가는 꽃잎파리와 분홍 매니큐어 칠한 언니 손톱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렇게 봄날 내내 아파하더니 언니는 봄날이 가듯 홀연히 집을 나갔다. 그리고 엄마 말씀처럼 세월에 상처가 아물고 형부와 만나 늦은 결혼을 했다.

작은 언니에게도 철철 눈물바람 봄날이 있었다. 하지 말아야할 아픈 사랑을 했던 큰언니와 달리, 작은 언니는 과격하고 이른 사랑을 했다. 그해 봄날 한 청년이 우리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밤새 석고대죄 했다. 죄목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겨우 열여덟 살 언니에게 임신을 시킨 거였다. 바위 같은 아버지마음을 눅지게 한 건, 몸을 뒤틀면서 밤을 새운 청년이 아닌, 복사꽃잎처럼 붉은 눈물을 베갯잇에 뚝뚝 떨군 작은언니 눈물바람이었다. 언니는 그 봄이 가기 전 면사포를 쓰고 어린신부가 됐다.

봄날이 간다. 그렇듯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인다. 변하고 움직임이 없다면 삶의 행간에서 겪는 아픔들이나 유쾌하지 않은 뇌꼴스럽고 살똥스런 일들을 어찌 다 견디어 내겠는가. 변하고 지나간다는 건 유익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나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 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는 내 소유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이 머그잔에는 변하지 않는 봄이 있다. 아침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변하지 않는 봄을 즐긴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천천히 마신다.

이 머그잔이 소중한 이유는 또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거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하나뿐이라는 건 특별한 일이다. 홍매꽃가지를 그려 넣고 유화를 덧칠하여 구운, 이 잔에 커피를 마시면 잔을 선물한 그분처럼 나도 붓글씨 전국초대작가 반열에 오른 듯 으쓱하다. 전에는 남편과 쌍둥이 잔에 마셨다. 그러나 이 머그잔이 내게 온 뒤부터 내 커피는 이 잔에 탄다. 그분이 수필선생 대우해주시는 걸 상기하면서 폼을 내면서 마신다. 그렇게 행복을 캐내어 누린다. 그럴라치면 남편이 건네다 보며 웃는다. 오늘도 머그잔에 내린 봄을 즐긴다. 커피가 조금씩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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