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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시간이 물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마치 어항 속에서 물고기가 지나다니듯, 물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듯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손님처럼, 예기치 않게 한나절의 시간이 한가로이 꿈처럼 주어진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낼까. 나는 얼마 전에 한적한 섬마을에서 혼자가 되어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다. 사연이 있는 것처럼 조금은 쓸쓸해져서 유유히 해변을 걷는 여인…. 영화 같은 일이 아니던가.

사연은 이랬다. 일박이일 섬 여행에 나선 첫날은, 숙소 뒷동산인 장자도대장봉에 올랐었다. 대장봉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왕복 40분정도면 충분한 산책로이다. 동백숲길을 꿈길을 걷듯 가볍게 걸어 정상에 올라섰다. 끝이 안보이게 탁 트인 동해와는 달리, 서해 장자도는 바다 가운데 산들이 이어져 있어서 마치 거대한 호수를 보는 듯했다. 오밀조밀한 섬들 사이로 지나다니는 청아한 녹주석물빛…. 눈이 시렸다. 서쪽엔 낙조를 앞둔 바다가 태양빛에 물들어 금물결을 이루고….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카메라렌즈를 맞추니 자연이 연출한 극한의 실루엣무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튿날, 무릎이 욱신거린다. 오늘은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 선유봉등 인근 섬을 트래킹 하는 날인데 난감했다. 얼마 전 부터 아픈 것을 살살 달래어 여행을 왔기에 무리하지 않고 열외하기로 했다. 섬마을에 혼자 있어보는 것이 쓸쓸하기보다는 낭만으로 여겨졌다. 아는 이 없는 섬 동네를 걷는 약간정도의 결핍의 정서가 좋다. 방파제너머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숙소가 이국적 풍경이다.

갈매기와 파도를 보며 천천히 걷자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섬 강아지 한 마리가 따라나선다. 이거야 짝사랑하는 이를 몰래 따라가는 시추에이션이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저도 멈추고 안 따라온 척한다. '허참 고 녀석이·' 하면서 뒤돌아보았더니 '누굴 찾으시나이까·' 하는 듯 제자리를 빙빙 돌며 자기는 제 할일을 그저 하고 있을 뿐이라는 듯, 땅을 파며 딴청 피운다. 그러다 내가 진행하면 저도 따라 걷는다.

햇살에 부서지는 작은 섬 교회의 종탑이 몽환적이다. 교회화단에 활짝 핀 목단이 나그네 걸음을 멈추게 한다. 벌 한 마리가 사발만한 목단 가운데 더듬이를 깊숙이 박고 흥건한 늪에 빠져있다. 활짝 열고 모두 내어주고. 사모하여 파고들고, 마치 하나의 흘레장면 같은 충만함이라니…. 그 풍경이 하도 진지하여 숨을 죽이고 보았다.

누군가에게 전부를 주는 일은, 누군가를 사모하여 흠씬 빠지는 일은 황홀함이다.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에게 나는 무엇을 줄까. 작은 가게로 들어가 무지개빛깔 쫀드기를 사서 잘게 찢어 강아지에게 주었다. 냉큼 먹을 줄 알았더니 킁킁 거리다 고개를 돌린다.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털의 윤기로 보아 범상치 않다 했더니만 고급음식만 먹이는가 보다. 심심풀이론 쫀드기가 제격이지 싶어 숙소로 가지고 왔다.

침대에 누우니 늘어진 해송이 방을 들여다보아 운치를 더한다. 강아지도 안 먹을 맛을 탐구라도 할양 쫀드기 한 가닥을 오물거렸다. 식감을 다르게 느껴보고자 요리조리 궁리한다. 너무 굵게 찢었는가· 너무 가늘게 찢었는가· 굵게 찢어먹다 가늘게 찢어먹다 변해버린 사랑을 탓하듯, 옛날 맛이 아니라며 밖으로 들고 나갔다. 모래위로 던지며 낮게 나는 바다 새 두어 마리를 불렀다. 쫀드기 맛이 변한건가 내 입맛이 변한건가. 갈매기야 판단해 보려무나. 이런! 구구 고갯짓만 할뿐 흥미 없어한다.

어릴 적에 학교 앞에서 쫀드기를 사면 오후 내내 흐뭇했었다. 그것도 이별이라고 나란히 찰싹 붙어있는, 피댓줄처럼 생긴 쫀드기를 떼어 내려면 비명소리인양 직! 하고 소리를 냈었다. 국수가닥보다 가늘게, 실처럼 가늘게 찢어 아껴 먹곤 했었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것이, 인생도 사랑도 아닌 것이, 씹을수록 감칠맛을 내며 그때는 입안의 온 세포를 일으키곤 했었는데, 많이 가미하지 않아서 담백하고 좋았던 그 맛은 어디로 갔을까. 그날 불현듯 주어졌던 그 섬에서의 한나절은 꿈꾸었던 것처럼 영화 같은 낭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금은 지루해져서 쫀드기 한쪽 물고 기억저편을 더듬으며 변해버린 입맛을 실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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