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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어머니는 해마다 장을 담그셨다. 팔 남매 중 스스로 담가 먹는 큰 시누이를 제외한, 일곱 집이 먹을 양을 담그셨다. 시누이들은 된장을 친정에서 퍼다 먹었다. 오십 줄이 넘도록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 그 일은 이어졌다. 시누이들에게도 각자 시어머니가 계시고 대한민국 어머니들 장 담그는 솜씨는 모두 선수 아니던가. 그런데도 된장만큼은 친정에서 퍼갔다. 몸은 시집갔어도 된장 맛은 두고 갔나 보다.

시누이들은 모였다 흩어질 때가 되면 장독으로 우르르 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까르르 장독이 들썩인다. 나로선 끼어들 수 없는 그녀들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날 나는 그 세계를 엿보다가 흥미로운 풍경을 관찰하게 됐다. 어머님께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형제자매간에 선물도 나누고 때로는 돈도 통용하는 관계다.

그런데 된장 앞에서는 눈빛이 달라진다. 단순 장맛이 좋아서라고만 하기엔 그 몸짓들이 너무들 진지하다. '이것만은 양보 안 해!' 하는 저 치열한 손놀림들은 뭔가. 값으로 치면 자신들이 사 온 비싼 어머님 옷값에 비할 게 아니잖나. 무언가 있다. 그 무엇이 무얼까. 그것은, 장맛을 넘어 공평하게 분배받는 모정의 영토였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분배하는 방식이 있었다. 마늘도 감자도 알밤도 제일 실한 건 장남인 남편 몫으로 갈라놓으신다. 그런데 된장만큼은 각자 퍼가라고 놔두셨다. 장독이 시끌벅적하다. 된장만큼은 큰오빠 우선이 아닌 공평한 우리 영토가 있다며 깔깔댄다. 그녀들이 주걱을 휘두르며 모정의 영토를 누린다. 그리움 맛 추억 맛을 푼다. 큰 양푼에 비빈 밥 앞에 숟가락 들고 대들듯 독을 들여다보며 장을 푼다.

2014년, 겨울 초입쯤 어머님 전화를 받았다. "에미야 올해는 된장을 놔서 담아야 겄다. 메주콩 여섯 말 샀으니 그리 알아라." "어머니, 해마다 서 말씩 사시더니 올해는 많이 사셨네요?" "그래야 할 것 같다." 서 말사면 일곱 집이 퍼다 먹어도 남아 갔기에 갸우뚱했으나 별다르게 생각 안 하고 콩값을 입금해 드렸다. 그리고 이듬해 어머님이 쓰러지셨다. 두 배로 담그신 게 마지막 장을 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날 나는 구급차로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 나이에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더라…." 하시며 구급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의학이 좋으니 어머님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하고 안정시켜 드렸다. 그랬더니 "에미야… 된장 죄다 퍼다 늬집 김치냉장고에 넣어라. 이번 장은 다른 애들 퍼가기 전에 한 주걱도 남기지 말고 모두 퍼가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하시는 거다. 평생 사신 집과 정든 세간들을 고스란히 두고 가시면서 된장을 말씀하시다니….

나는 대답을 못 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유언처럼 된장 말씀을 하시는 거다. 구급차 안에서 하신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3차 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3차 병원으로 입 퇴원을 반복하시며 6개월 넘게 전전하시다 결국 요양원에 안정하셨다. 그리고 7년 후 하늘나라로 가셨다. 요양원이 우리 아파트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지라 코로나 전까지 아침저녁으로 들러 안부를 여쭈었다. 시골집에 한번 가고 싶다고 하셨으나 누우신 상태로 수백 리 이동하시다 큰일 당할까 두려워 그리할 수 없었다.

하루는 큰시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말대로 해요. 애들에게 이번에는 퍼가지 말라고 전화했어요." 내가 실행을 안 하니 어머니가 큰시누이에게 전화하셨나 보다. 나는 그녀들 영토는 남겨 놓고 된장을 퍼왔다. 그런데 얼마 후 막내 시누이가 전화를 해왔다. "언니, 된장 마르기 전에 모두 퍼다 김치냉장고에 넣으셔요. 엄마 유언이고 유산이잖아요." 하는 거다. 나는 그녀들의 영토를 갈취하는 심정으로 나머지 된장을 퍼 담았다. 어머니가 다시는 장을 담글 수 없다는 사실에 울면서 펐다.

남편을 키운 산골 바람에 숙성하여 내 집으로 와 자리 잡은 된장은 내 집 보물 1호다. 8년이란 시간이 숙성시킨 보물을 아껴 파먹는 방식이 있다. 큰 김치통에 담겨 꾹꾹 눌린 된장을 한 주걱 파서 작은 통에 옮겨 담고는 다시 꾹꾹 눌러 뚜껑을 덮어 놓는다. 그리고 누가 보면 안 될 것처럼 그 위에 김치통을 올려놓는다. 된장만큼은 점 하나만큼도 나가지 않는다. 어머니 사랑 한 숟가락 떠서 뚝배기에 풀 때마다 공평한 우리 영토라며 깔깔대던 소리가 들린다. 눈이 시리게 그리운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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