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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기찻길에서 주워온 막둥이 왔어?" 엄마 따라 밤마실을 가면 엄마 친구분들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기찻길에서 주워왔어?" 할라치면 "귀여워서 하는 소리야." 하셔서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정집 앞으로 경부선 기찻길이 놓여있다. 길게 놓인 기찻길은 혜옥이와 나의 놀이터였다. 위험천만한 우리 놀이를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를 타고 내리는 플랫폼에서는 금테 모자를 쓴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재했으나 플랫폼을 벗어나 있는 우리 놀이터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레일에 귀를 대면 '또도독 또도독'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로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열까지 세자." "하나! 둘! 셋!" 하고 세다 기차가 가까이 오면 레일에서 뚝 떨어져 나갔다. "차르륵! 쉭쉭!" 성난 물체가 굉음과 바람을 내며 지나간다. 너무 가까우니 늘 들어도 주눅이 든다. 육중한 물체의 광란이 한바탕 지나면 1자 걸음 시합을 했다. 레일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더 멀리 가야 이긴다. 집에 갈 때는 선로 주변에 깔린 작고 맨질맨질한 돌들을 주워 치마에 담아와 마당에 뿌려놓고 공깃돌 놀이를 했다. 밤톨보다 작은 돌들이 많아서 '많이 공기'라고 했다.

나는 정말 기차 소리를 타고 왔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그 논리에 확신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기찻길에서 주워왔다고 아주머니들이 말할 때 묘한 표정과 웃음소리에 비속어를 함축하고 있었다. 나로선 알 수 없는 그 어느 날, 어둠을 가르고 달리는 기차 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세상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야 엄마가 첫 손자를 본 1년 뒤, 어찌 나를 낳으실 수 있단 말인가. 무뚝뚝한 아버지가 대가족이 사는 집에서 대낮에 엄마와 눈짓을 하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기차 소리가 익숙하다. 한 몸처럼 편하다. 그 소리는 내 안에서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매일 져도 경마에 돈을 거는 것처럼, 사랑에 실패해도 사랑을 하는 것처럼, 나는 기차 소리를 주기적으로 들으며 산다. 그 소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들린다. 기차 소리가 먼저일까. 내가 먼저일까. 내가 나를 인지하지 못하던 때부터 기찻길이 있었으니 기차 소리가 먼저겠다.

기차 소리는 수면제다. 섬 집 아기가 파도 소리에 잠들듯 기차 소리는 나를 재운다. 어머니 자장가가 없어도 기차 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한데 잘도 잤단다. 외국 여행 중 기찻길 주변에 숙소가 있었을 때 남편은 뒤척였지만 나는 숙면했다. 불면증으로 힘드신가? 그게 나라면 기찻길이 있는 동네로 이사할 거다. 기찻길은 꿈이다. 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언젠가 나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기찻길은 슬프다. 하염없이 기찻길을 바라보며 울던 날도 있었다.

기차 소리가 아니어도 인간은 소리 속에서 산다. 깊은 동굴에서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미생물이 자라듯, 사람도 소리 속에서 자란다. 모태에서 양수 흐르는 소리, 엄마 말소리, 꼬로록 엄마의 음식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며느리가 손자를 재울 때 머리맡에 핸드폰 음악을 틀어 놓는다. 기계가 부르는 신식 자장가다. '화르르륵 휘리릭' 반복되는 소리가 손자에게는 제 어미 양수 소리처럼 들리나 보다. 며느리는 자갈을 씻기며 흐르는 물결 소리라고 하고, 아들은 세월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고목과 이끼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 같단다. 그런데 나는 '화르르륵 휘리릭' 하는 그 소리가 '쉬리리릭 쉬리리릭' 지나는 기차 소리로 들린다.

흰 눈에 반사되어 빛나는 겨울 기찻길을 아시는가. 그리움과 추억이 수만 가지나 떠오르는 이 시점에서 그곳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현실 속의 나와 밀당할 이유 또한 없다. 당장 가야 하는 이유는 겨울이어서다. 하얀 눈 쌓인 논밭을 가르고 놓인 레일, 레일, 레일! 기차 소리에 가슴은 뻥 뚫리고 헛헛하던 빈속은 채워지리. 하염없이 기찻길에 서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보리. 지금은 사라졌으나 기찻길 옆에 있던 잘 늙은 집 한 채도 꺼내고, 해맑던 혜옥이 미소도 불러내 만 겹의 추억에 젖어 보리. 하염없이 기찻길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에 흠씬 빠져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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