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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오랫동안 컴퓨터 비밀번호와 현관 비밀번호가 103506이었다. 한 번호를 너무 오래 쓰는 것 같아 변경했지만, 그 숫자는 지울 수 없는 타투처럼 내 안에 새겨져 있다. 103506은 나의 과거다. 과거는 현실을 지탱해 주는 의미이고,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까지 그리워할 대상이다. 의미 없는 과거는 없지만, 내 인생 60년 중 그 숫자와 함께한 23년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너무 소중하기에 쓰다만 몽당연필을 내던지듯 하지 않고 이 숫자를 품고 산다.

103동 506호, 전에 살던 아파트 주소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나. 우리가 산모롱이에 핀 꽃만을 사랑하는 게 아닌, 산 그 자체를 사랑하여 산에 가듯, 나는 그곳에 머물던 시간 전부를 사랑한다. 그 숫자를 떠올리면 기억창고에 쌓인 추억들이 안다미로 와서 안기어 현재라는 찻잔에 넘쳐흐른다. 도망가는 옛 시간 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나이 들어가는 야윈 쓸쓸함이다, 해도 그리움을 멈출 수는 없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떤 여자아이가 현관 출입구 앞에서 아까부터 서성거린다고 앞집 사는 이가 말했다. 베란다로 내다보니 이게 웬일? 우리 집과 거리가 꽤 되는 곳에 사는 교회학교 4학년 여자아이 아닌가. 아들 방을 두드리며 말했더니, "아휴, 저 애가 나 좋아한다고 애들이 놀려요. 관심 없어요." 하는 거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들이 있어서 저 고생하지 않을 건데, 좋아하는 아이 집 앞에 와서 서성이는 그 아이가 사랑스럽고 짠했다. 어떡하면 이 상황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결할까, 고민하며 나가 아이를 돌려보낸 적이 있다.

그 집에 살면서 두 아이 혼사를 다 치렀는데 어찌 좋은 추억만 있겠는가. 중학생 아들 성적이 성에 안 차자 남편은 불성실을 빌미로 아들 엉덩이를 타작했다. 대놓고 역성들 수는 없는 일, 찢어지는 가슴을 누르다 그날 밤 남편을 놀이터로 불러냈다. "앞으로 내 아들에게 절대 손대지 말아욧!" 이렇게 악을 썼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끼고 아껴도 대출금 가위에 짓눌러 나도 모르게 박봉 타령을 했는데 순간, "공무원이 도둑질이라도 하란 말이냐?"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사과 담긴 접시가 쌩하고 비행하다 바닥에 깨져 작은 애가 놀라 울었다.

내 집에 문패를 단다는 건, 원초적이면서도 치열한 욕망 같은 거였다. 현실은 슬픈 꿈을 가진 깡마른 몸뚱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겨울나무였다. 돈이 있을 때 집을 장만하는 건 불가능한 일, 저지르고 보자 하고 무리한 대출을 받아 입주했었다. 그렇게 해서 장만한 집인데도 얼마나 좋았던지 입주 첫날 잠을 설쳤다. 우리 가족 이름을 쓴 문패를 달고 싶었는데 아파트라 절제했다.

그 후 대출금 상환 목적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삶은 녹색 눈빛을 가진 괴물처럼 사람 마음을 먹이 삼아 진탕 즐겼다. 팔 남매 장남 역할, 아이들 교육비, 수입지출 경계가 허물어지며 지출이 많은 기현상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래도 가난이라는 현실의 숲에 부채청산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꿈을 심고 아침부터 밤까지 움직였다. 무엇이 그리 초조하게 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쫓겨 다녔다. 아이들 남편 뒷바라지해가며 유치원 근무, 늦은 오후에 피아노 강사, 저녁으로 주말로 피아노 조율을 하러 다녔다. 그렇게 땅을 파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눅지게 못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23년을 살고 나니 돌덩이 같던 부채부담이 점점 사라지며 삶이 말랑말랑한 물렁뼈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그 홀가분함을 누릴 새도 없이 아이들이 떠났다.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다녔다. 아이들 방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도 떠나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수많은 추억을 간직한 채 정든 103동 506호를 떠나왔다.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액자를 떼니 네모반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젊은 날 네모반듯하게 살아낸 삶의 자국이다. 23년간 걸려 있던 때 묻은 액자는 버리고 그 반듯함만 챙겼다. 못 하나 박는 데도 신중하며 살뜰히 아끼던 내 집도 넘겨주고 103506 숫자만 가져 왔다. 이제 열기구처럼 느림으로 이루어진 일상이 이어진다.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103동 506호에서의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꿈길이다. 하지만 103506 숫자는 또렷하여 가끔 서리서리 추억들을 꺼내 채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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