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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1.11.04 16:54:15
  • 최종수정2021.11.04 16:54:15

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38년 전 봄날, 아들을 낳아 남편에게 안겨 주었더니 "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어떤 날은 아기 기저귀 똥 냄새가 구수하다는 말도 했다. 남편은 4월 초 생일인 아들을 호적에 음력으로 올렸다. 1년 일찍 학교에 입학시킬 목적이었다. 아들은 복권 추첨을 하듯 물레 손잡이를 돌려 초록 은행 알을 떨어뜨렸고, 8대1 경쟁률을 뚫고 소수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날 남편은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한 것처럼 만세를 불렀고, 어린 아들도 덩달아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두 남자 간에 전쟁이 시작됐다. 본디 남자의 계보란 것이 전쟁의 계보였다지. 밤과 낮이 생겨나 혼돈과 공허가 흐르고, 세상에는 신들만 존재하던 카오스 시대부터 부자간에 전쟁이 있었다지…. 말이 전쟁이지, 아들이 번번이 항복해 휴전했다. 절대자의 승리가 뻔한, 해보나마나한 전쟁인지라 아들이 늘 깃발을 내리곤 했다. 강자의 잔소리가 무슨 전쟁일까마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상흔이 남으면 전쟁이다. 한바탕 치르고 나면 우리 가족 모두는 냉과리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사람 좋다 소리 듣는 그가 유독 아들에게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한번 패권을 차지하면 누구의 도전도 허용하지 않는 희랍신화 속의 비정한 아비들처럼 아들에게 남편은 넘을 수 없는 강이었다. 두 남자 간에 갈등 원인은 무엇일까. 중간에 있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아무 나쁜 짓도 한 것이 없다.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연 것도 아니고, 이간질 같은 건 더욱 안 했다. 다만, 네 아빠는 시오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고, 열네 살 때 쌀 한 말 짊어지고 도시로 나가 자취했고,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왔다는 둥, 집안에 회자 되는 이야기를 말해준 건 있다.

아들은 독서를 즐기고 기타연주 등 재능 꾼이다. 문제는 문제지를 풀지 않고 시험을 치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날은 무기를 사용했다. 성적이 밀려났다는 이유로 엉덩이 타작을 했다. 그는, 1등을 못 해서가 아니고, 문제지가 깨끗한 불성실 문제라며 포성의 정당성을 말했다. 그날, 치욕과 무너지는 자존감으로 흘리는 아들 눈물을 보았다. 웃는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듯,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그는 밤새 뒤척였다.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확고한 의사 표현일 때도 있다. 아들은 공격받을 때마다 무언으로 항변했다. 무릎을 꿇고 제 아비 설교를 듣고는 있지만, 불끈 움켜쥔 제 주먹을 향해 내리깐 눈은 '때가 되면 크게 한 방 먹여드리지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제 자식을 안다. 양처럼 엎드려 있으나 후일을 도모하는 눈빛을 알고, 언젠가는 아비를 굴복시키고 말, 결코 만만히 볼 놈이 아니란 걸 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아버지 기대에 휘둘리는 삶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세 번째 고시에 낙방하고 내려온 아들이 선 공격을 했다. 정녕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었으나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 미친 짓을 했다고 했다. 신기루 노량진에는 자신 같은 사람이 수십만 명 있다고 했다. '신도 포기할 것 같은 광야에서 고독을 감내한 시간이 얼마인데, 합격 턱 선까지 가지나 말 것이지, 고지가 바로 손끝인데 포기라니!' 남편이 할 말을 나는 속으로 꿰고 있다. 그런데, "그간 고생했다. 우리 접자." 예상을 뒤엎은 패배 선언이다. 크로노스 시대는 끝났다. 금시 자라 힘을 갖춘 제우스가 제 아비 크로노스를 굴복시키는 그리스신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보았다. 아비에 대한 두려움을 제압하고, 공격할 수 있는 용기와 이성과 의도를 휘두르는 아들을 보았다. 아들은 그렇게 가슴을 키워 자신의 길을 찾아 세상으로 나갔다.

긴 포성이 멈추었다. 인간과 신들이 얽혀 하나의 세계를 이룬 것처럼 부자가 하나 되어 뒹군다. 이 평화의 주자는 누굴까. 힘을 길러 제 아비를 꺾은 아들일까. 내려놓음을 터득한 남편일까. 무엇이 있다.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물 가운데를 지날지라도, 불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둘을 갈라놓거나 끊을 수 없는 그 무엇, 두 남자 사이에는 사랑이니 천륜이니 하는 통상의 말을 넘어 남자들만의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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