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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수필가

파란 호수와도 같은 시각적 질감이 느껴지는 오월하늘이 좋다. 사과나무가 줄지어 손 흔들고 장미가 흐드러지던 날, 추사(秋史) 김정희의 옛 집을 찾아갔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261번지에 있는 추사고택은 아담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선지의 넉넉한 여백처럼 고택을 감싸고 있는 너른 주차장에 내려서니, 추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단아한 솟을대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눈썹처럼 가늘고 긴 고택의 맞배지붕 끝이 팔작지붕과 균형을 맞추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품 있는 마님이라도 된 듯 조심조심 계단을 밟아 대문에 들어섰다. 사랑채다. 영감께서 기침이라도 하신다면 가슴 설레어 사분거리는 걸음을 살포시 멈춰보련만 임은 기척이 없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으로 ㄱ자형이다. 그 앞에 '石年(석년)'이라 쓰여 있는 돌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해시계를 올려놓고 그림자로 하루시간을 가늠했단다. 돌과 시간이 합쳐지는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돌기둥 아래쪽에 그의 서자 김상우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 때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가히 부전자전의 실력이다.

안채로 갔다. 조선시대 아녀자의 자존심만큼이나 대청마루가 높다. 기둥마다 붙은 주련들을 통해 추사의 글과 서체에 빠져보고, 세한도를 보며 그림세계에 빠져본다. 오른쪽 방이 추사증조모이자 영조둘째 딸인 화순옹주가 지내던 방이란다. 안채에서 시야의 터짐이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다. 툇마루에 가만히 엉덩이를 내려놓으려는데, 해설사가 구태여 우리에게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보라고 권한다. 무슨 연유인가 하여 올라선 누군가에게, 마님자리에서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소회가 어떠냐고 묻는다. "갑자기 위풍당당해지는데요·" 하고 대답해 한바탕 웃었다. 당시 마님들이 어떻게 품위유지를 하면서 그 자리를 지켜나갔는지 해설사가 부연설명을 한다.

"내가 마님소리 듣던 사람여! 알아·" "네 마님! 얼른 갈아 드릴 게요·"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고함치는 한 할머니와 요양사의 대화가 잠시 스쳤다. 치매환자가 아님에도 툭하면 다른 어른들을 무시하는 말을 내뱉고, 부를 때 늦게 가면 "나 때문에 벌어먹고 사는 것들이!" 하면서 타인들을 괴롭힌단다. 부자로 사시던 분이 변의요의를 느끼지 못하는 와상환자가 되어 남의 손에 의지하고 사신단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심정을 백번 이해는 해도 곤욕스럽다고 하소연하는 걸 들으면서, 어떻게 품위를 지키며 늙어가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마님자리, 우리 선조들의 마님자리에 대한 개념은 단순 명령과 사람을 부리는 차원을 넘는 자리였다. 위풍당당한 자존감으로 품위 유지를 하면서 아랫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는 자리였다. 애민정신을 실천하여 가진 것을 나누는 자리였다. 식솔들을 살피는 건 물론, 마을사람들 중 배고파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없도록 두루 살폈다. 식솔이 아닌 동네사람들이 쌀을 퍼가는 경우, 그들의 자존심을 배려하여 주인마님 얼굴이 마주치지 않는 장소에 뒤주를 두곤 쌀이 떨어지지 않게 정기적으로 채워 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남편 김한신이 죽자 곡기를 끊고 슬퍼하다 따라 죽은 화순옹주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감상에 젖어들었다. 어떻게 그리했을까.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어떻게 그리 했을까.

추사여! 오늘은 무엇을 쓰고자 하심이니까.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화선지 삼으면 임의소원까지 닿을 런지요. 옛 사람들을 그려본다. 급변하는 굴곡진 시대를 살면서도 고도의 이념미로 시·서·화를 망라해서 독창적 길을 창출한 추사를 그려본다. 그리고 한 남자만 뜨겁게 사랑했던 화순옹주를 비롯해 마님자리에서 품위를 지키며 살다간 조선의 여인들을 그려본다. 벌판위로 불어오는 실바람도 수백 년 전에 살다간 과거 사람들을 그리다 갈참인양 단아한 지붕위로 지나는 새털구름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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