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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조선 성리학을 논하면서 우암(尤庵)을 빼 놓을 수 없다. 우암은 거유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아호다. 우암을 굳이 이 시기에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지난달 27일 대전 회덕 남간정사에서 선생의 탄신 410주기 추계 제향이 열렸기 때문이다. 옥천 구룡촌에서도 옥천문화원 주최로 지난 10월 24일 열린 것을 감안하면 두 군데서 제사를 지낸 셈이다.

우암은 성인의 경지인 자(子) 칭호를 받은 조선의 큰 유학자다. 송자(宋子)는 공자 맹자 주자를 잇는 최고의 영예다. 아무리 퇴계나 율곡이 훌륭한 유학자라고 해도 '자' 칭호를 받지 못했다.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자 유학이 퇴색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산간에 숨어 북방민족인 청나라지배자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은 명나라가 망했어도 유학이 퇴색되지 않았다.

임진전쟁 당시 조선을 도운 의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대명의리 사상으로 뭉친 조선의 학자들은 청나라 시기에도 그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라고 표기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연호를 계속해서 쓴 것이다. 그 선두에 우암이 있었다.

우암은 외가인 충북 옥천 구룡촌에서 출생했다. 부친 송갑조의 처갓집이라고 하나 어린 시절 송씨도 노비 헌비에 의해 그가 길러진 것을 보면 그 선대부터 옥천에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우암은 20대를 옥천에서 보냈으며 선향인 대전 송촌에서 송준길 등과 공부를 한다.

우암이 진짜 스승을 만난 것은 논산 사계(沙溪) 김장생이다. 우암은 논산에서 기숙하며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사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스승의 아들 김집 한테도 배웠다.

우암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사했다. 27세에 비로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것이다. 생원시에서 논술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란 글은 명문장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생원이 된지 2년 뒤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이 것이 나중에 북벌을 계획하는 끈끈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우암은 낙향하여 10여 년간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우암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의 영수로 주자세계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은 정치가였다. 기회만 있으면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하라고 권했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는 민생의 안정은 물론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씀씀이를 줄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사노비의 억제까지 건의 했으며 과부의 개가 허용과 서얼의 철폐를 부르짖은 것을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그를 가리켜 고루한 유학자란 표현은 적당치 않다.

우암은 만년에 괴산 화양동에 오래 머물면서 필생의 역작인 송자대전을 완성한다. 송자대전이라는 명칭은 정조가 붙여준 영예로운 호칭이다. 정조는 우암의 문집을 규장각에서 찍어 전국에 배포할 것을 명할 정도로 우암을 존경했다.

송자대전은 동양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방대한 저술이다. 우암의 학문과 당대 역사, 사상, 문학을 집약해 놓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다. 송자대전 판각은 본래 화양동에 있었으나 조선 말엽 불이 나 소실되고 말았다. 대전 송촌 장판각에 있는 송자대전 판각은 1907년에 후손들이 다시 번각 한 것이다. 이 판각도 괴산 화양동 만동묘 자리로 옮겨져야 그 가치가 산다.

영동 보은 괴산등엔 우암이 족적을 남긴 곳이 많다. 이 곳 산천을 특별히 사랑한 때문이다. 우암은 옥천에서 낳아 괴산에서 학문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청천리에 잠들어있다.

우암이 그토록 사랑했던 화양구곡 대명의리의 산물인 만동묘(萬東廟)는 지금 한.중 우호역사회복의 화두로 떠오른다. 앞으로 중국 요우커들이 많이 찾을 명적(名蹟)중의 명적이다. 그런데도 정작 괴산만이 우암을 잊은 것 같다. 송자(宋子)는 진정 충북인으로 동양 유학사의 거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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