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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몹시 뜨거운 여름이었다.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녀 집을 찾았다. 애써 태연한 듯 반기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몰라보게 여윈 그녀의 얼굴은 이미 병색이 깊었다.

그녀가 마음을 비우고 산사로 떠나기 전, 날 만나길 원했다. 그간 써 놓은 최종 원고를 넘겨주었다. 말도 안 되게 쓴 엉성한 글을 책으로 내주려면 선생님께서 고생 좀 하실 거라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명쾌하게 어떤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가 않아 나도 멍하니 침묵만 지켰다. 불과 몇 개월 정도만 버틸 수 있다는 병원 선고가 얼마나 아득한 절망이었을까.

누구든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이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잖은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거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청주시에서 일반시민 대상의 문화사업인 '1인 1책 펴내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나만의 소중한 책을 엮는다는 기대로 수업 시간마다 문학소녀의 감성을 깨우며 글 쓰는 시간을 내내 행복해했다.

그녀는 유달리 환하게 웃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조차 뒤늦게야 알고 많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내심 떠날 일을 대비해 예순 가까이 살아온 날을 한 권의 책으로 정돈하려는 그녀의 조바심이 엿보여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삶이란 아름다움뿐만이 아니고 어쩌면 고달픈 곡예이기도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버릴 순 없다. 망망대해 떠 있는 작은 조각배처럼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 모르는 위태로움도 겸허히 받아들일 거라고 그녀는 글 한 편에 다짐했다.

하지만 그 결연한 의지에는 지금의 고통에서 우뚝 일어서고 싶은 간곡한 절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번잡한 심정을 스스로 다독이고, 삶을 정리하듯 두 아들과 담담히 주고받으며 쓴 편지는 끝내 나를 울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걸어온 그녀의 전화 목소리는 마른 가랑잎처럼 부서질 것만 같았다. 가는 사람은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의 고통이 더 클 거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며 애달파한다. '그건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이 입안에 자꾸 맴돌았지만, 끝내 그녀에게 전하진 못했다. 마치 곧 그녀의 불행을 인정하는 듯해서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녀가 어느 깊은 산에서 꺼질 듯한 목숨과 때로는 명료한 의식 사이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그녀의 글을 다듬다가 시야가 흐려져 번번이 손을 놓곤 했다. 특히, 길가 들풀 같은 평범한 한 여자의 흔적을 남기고자 욕심을 부렸다는, 자신을 위해 눈물 속에 기도를 쉬지 않았을 가족, 그리고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뜨거운 마음을 보낸다는, 작별의 말일지도 모를 그녀의 인사말을 책 맨 첫 장에 올리며 나는 어디론가 끝없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싶었다.

임정숙 약력

△ 2000년 문학공간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총무, 충북수필문학회 총무 역임

△ 수필샘 동인회 부회장, 충북수필문학회 편집위원

△ 수필집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2009년)'

△ 공저 수필샘 동인지 '열두집 창가' 외 9집

△ 2007청주예술공로상 수상

△ 현) 청주 · 청원 1인 1책 펴내기 팀장

△ limjs60@hanmail.net

어느 찰나의 시간도 우리를 기다려 주진 않나 보다. 그녀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아들이 급히 출판사로 달려가던 날, 하필 그 시간에 그녀가 임종을 하였다 하니 참말로 덧없기만 한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보다.

한 여인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책장 갈피갈피 깊었던 사연들을 그녀의 온기 어린 손길로 넘길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어머니 입관할 때 책도 함께 넣어 드렸어요"하는 아들의 말에 다시 또 눈앞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힘든 몸으로 남긴 유작은 슬픔에 찬 가족과 지인들에게 오래 기억될 선물이 되었으니 그래도 행복한 떠남인가. 몇 해 전 가을, 그녀를 보내고 오던 길에 유독 푸르던 하늘과 곱디고운 단풍의 화사함이 새삼 아릿하다.

그러나 여전한 건 가까운 사람, 좋은 사람,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도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거리에 차들은 어디론가 바삐 속력을 내며 달리고 있다. 이른 시간에 집 앞 제과점을 지나면 고소한 빵 굽는 냄새도 그대로이다. 유리창 너머 세탁소 아저씨는 꾸부정한 허리로 변함없이 다림질을 하고, 웃음이 많은 앳된 생선 가게 여인은 익숙한 솜씨로 고등어를 손질하고 있다. 어제 보았던 풍경과 별다를 게 없다.

하마터면 나도 무심한 세월 속에 그녀를 잘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장에 한 송이 꽃처럼 그녀의 향기가 머물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고 그녀의 존재를 추억처럼 떠올렸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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