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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6.09 17:00:3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청보리가 무성하게 익어갈 무렵 내 나이 여덟 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많은 사람이 여름 피난을 멀리 떠나는 사람도 많았는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동네 앞쪽 들판에 사태 밑이라는 고샅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는 공동묘지였던 곳인데 후미진 골짜기에 절벽을 이용하여 옆으로 몇 날 며칠을 흙을 파내어 방공호防空壕를 만들어놓았다. 입구는 가마니로 대문을 만들어 놓고 사이렌이 불면 마을 사람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숨었다. 밤이고 낮이고 깜깜한 그 굴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비지땀을 흘리며 피난해 있던 그때가 무더운 6월이면 생각난다.

그렇게 여름 피난은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여 어린이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미처 익지도 않은 밀이나 청 보리를 꺾어 구워먹던 기억은 동네 개구쟁이들의 옛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음 해 겨울이 닥치면서 우리가 압록강까지 수복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전세가 역전하여 당시 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김으로써 1.4 후퇴라는 위기에 아버지는 보국대로 끌려가시고 우리 식구는 보따리를 싸 청주를 떠나 조치원 외가로 피난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에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어머니는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14살 오빠와 나, 할머니까지 조치원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신작로 한복판은 지프, 군인이 탄 트럭들이 즐비하게 달리는데 우리 식구는 한쪽 갓길을 조심조심 타박타박 발길을 옮겼다. 우리 앞에도 뒤에도 끝이 없는 피난 행렬이었지….

김정자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청주시문화공로상 수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청주예술공로상

△제7회 홍은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1인1책 펴내기 운동 프로그램 강사,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저서로는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41인 명작품 선집

피난 행렬

다리를 건널 때면 피난민들은 다리 아래 냇물이 꽝꽝 언 얼음 위로 건너야만 했다. MP라는 굵은 글자로 새긴 모자를 쓰고 커다란 총을 들고 있어 참으로 무섭게 생긴 미군 헌병들이 총대로, 어른들은 조금 세게 어린 나와 오빠에게는 뒷다리를 슬쩍 건드리며 건너라고 했다.

조치원역전까지 외사촌 오빠가 지게를 지고 마중 나왔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머리 위에 이고 가시던 이불 보따리는 외사촌 오빠의 지게에 얹고 그 위에 나를 태워 걷기 시작하여 어두운 한밤중에 가루니 라는 조치원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 외할아버지 댁에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외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뜨셨고 외할아버지와 외사촌 오빠 올케와 나보다 어린 조카가 있어 나름대로 그 애들과 함께 놀기도 하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그 산골짜기에는 오로지 집 네 채만 있었다. 옆집에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날이 밝으면 그 아이가 외가 울 밖에서 기웃거리며 내 동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외사촌 올케언니는 나에게 '아가씨'라며 다정하게 불렀는데, 너무도 구수한 장떡을 잘 쪄주셨다. 커다란 무쇠솥에 보리쌀을 푹 삶아 외할아버지께 드리는 밥과 나에게는 입쌀을 얹어주었고 그 솥에서 빨간 밀가루반죽에 풋고추, 감자를 섞어 삼베보자기에 찐 장떡은 지금도 이따금 생각날 때 해먹는 추억의 음식이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외사촌 올케는 내가 장떡을 부쳐 먹을 적마다 보고 싶은 그리움에 젖는다.

찬바람 씽씽 불어 문풍지가 날리던 겨울밤이면 다리를 건널 때 보았던 무섭기만 했던 미국 헌병들이 둘씩 짝을 지어 사람이 사는 민가를 찾았다. 초저녁부터 외할아버지는 삽작-문 밖 두엄 탕쯤에 나가 보초를 서셨다. 미국헌병들은 동네 어귀에 올 때면 프래시(손전등)를 번쩍이며 오기 때문에 그것이 신호가 되어 집에 돌아와 알리면 어머니와 올케는 뒷뜰 울타리에 개구멍처럼 만들어놓은 구멍으로 나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와서 온 집안을 살펴보고 돌아가곤 하였다.

어머니와 외사촌 올케는 아기를 업은 채로 그 산속의 참나무 숲으로 숨어들어 간을 졸이며 시간을 보낼 때 아기가 울까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외할아버지가 신호를 보낸 다음 밤이 깊으면 그 제서야 겨우 집에 돌아오셨다. 그곳에 사는 동네 아줌마들은 모두 그렇게 밤만 되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따금 대낮에 그들이 찾아올 때가 있어 외할아버지는 늘 마을 어귀에서 보초를 서 계셨다. 나는 그들이 오면 무서워 방안에서 창호지 문에 만들어놓은 조그맣게 네모난 유리창으로 그들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문을 열어보라고 손짓을 하여 문을 열었을 때 잡혀가는 줄 알고 엉엉 울었다. 그 후부터 나는 할아버지 댁 다락에 숨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 미국사람들이 적군인 줄 알았다. 얼마 동안 그렇게 숨바꼭질을 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은 오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어려서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 미군들을 피해 피난 온 것으로만 알았다. 차차로 나이를 먹으며 그들이 왜 한밤중에 민가를 찾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아찔했던 그 순간들을 모면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 한다.

사람들은 빨갱이를 피해 피난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빨갱이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길바닥에 사람 죽은 모습도, 옆에 폭탄이 떨어져 손발이 잘린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때 마다 나는 얼마나 편안한 피난살이를 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 자주 나를 업어주시던 외사촌 오라버니는 90이 다되어 백발이 성성한 채 지난 세월을 머리에 이고 계신다. 피난 가 있던 동안 자식보다도 나에게만은 따듯하게 대해주셨던 고마운 오라버니시기에 이따금 생각나 찾아뵙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해마다 6월이면 어린 시절 두 번의 피난살이가 생각난다. 다만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사는 현실이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내부에서조차 붉은 사상에 물든 좌익과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종북 세력, 보수층, 진보층이니 하며 남남갈등이 빈번한 요즘, 불안하기만 한 세상을 산다. 외국에서는 우리가 곧 전쟁이 터지는 위험한 나라라고도 한단다. 만약 한국전쟁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전처럼 피난길을 떠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난다는 현시대에 살고 있으니 내가 어려서 겪었던 그때보다도 더욱 불행한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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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