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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는 소리로 먼저 나그네를 반긴다. 청아한 계곡 물소리와 풍경 소리가 산사로 안내한다. 산사로 오르는 길은 번뇌가 끼어들 틈 없는 자연의 길이다. 돌에 걸려 넘어질까, 벼랑 밑 바위에 낀 푸른 이끼에 미끄러질까 조심하다 보면, 절집은 보이지 않으나 먼 데서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굽이진 돌너덜 길을 올라간다.

흔한 일주문과 사천왕상도 없는 빈약한 절이라고 그 누가 비웃으랴. 산사에 당도하기 전 나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길섶에 보랏빛 얇은 가사를 걸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피어난 얼레지 꽃이 지천이고, 공손히 절을 올리는 듯 등 굽은 나무들의 기묘한 형상을. 어찌 이 매혹적인 장면이 절을 향한 헌화공양이 아닐 수 있으랴.

크고 작은 폭포 소리에 눈과 귀를 씻고 마음을 닦다 보면, 우화루 앞에 다다라 있다. 우화루 옆 돌계단을 올라 허리를 구부려 작은 대문으로 들어선다. 스님은 출타 중이고, 주인의 말을 풍경 소리로 전한다. 서편의 적묵당 그림자가 마당을 길게 차지하고, 비가 내렸는지 바닥에 보기 좋게 일자로 골이 나 있다. 정문 격인 우화루엔 치장하지 않은 목어가 공중에서 노닐고 벽에 걸린 목탁은 스님을 기다리는 성싶다.

ㅁ자형 구조의 전각은 사찰이라 하기엔 조금은 빈약해 보인다. 그러나 전각 하나하나를 톺아보니 나의 잘못된 생각임이 바로 드러난다. 처마 단청이 적당히 빛바랜 극락전은 백제 시대 건축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낳은 하앙식 구조에, 국내 유일한 목조 건축의 백미란다.

이은희 약력

· 2004년「월간문학」등단

·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충북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외 다수.

·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 편집위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외 활동

· 저서로「검댕이」외 3권 수필집 출간

· 현재 (주)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중.
처마 밑 현판 또한 소박하다. 여느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금칠을 한 글자도 아니고 한 곳에 멋들어지게 쓴 현판도 아니다. 삼십 센티미터 남짓한 정사각형 목재에 극 · 락 · 전 세 글자가 따로따로 조각되어 있다. 처마를 바라보면, 입으로 소리를 내 읽지 않아도 글자를 읽는 양 환청을 듣는다.

뒤꼍으로 가는 길에 만난 키 작은 부도는 누구의 것일까.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싶다. 비에 패인 노면을 그대로 두어 부도가 쓰러질 듯 세워져 있다. 이 또한 남 보이기 위한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청빈한 절이라고 가늠한다.

그곳을 다녀온 지 일주일째다. 내 눈앞에는 산사를 오르며 보았던 경치가 무시로 그려진다. 그 길을 따라 걸어 오르는 상상을 하면, 나의 메마른 귀를 어루만져주던 기분 좋은 물소리가 따라온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볼거리가 없다고 여긴 산중에 나타난 크고 작은 폭포와 풍경을 뒤로하고, 어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우랴.

화암사는 인간의 손을 덜 탄 누구 말대로 곱게 나이 든 '잘 늙은 절'이다. 오죽하면 건축물을 보고 잘 늙었다고 표현했겠는가. 이곳을 보고 감탄에 마지않아 시(詩)를 쓴 안도현 시인과 그곳에 머물었던 선인은 아마도 이심전심이었으리라. 나도 시인처럼 "혼자 가끔 소중한 책처럼 펼쳐보고 싶은" 곳이다.

극락전을 바라보니 선문답 같은 자문자답이 떠오른다. 해를 더할수록 자주 하는 질문이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만 잘 살았다고, 어찌 늙어야만 잘 늙었다고 말할 것인가. 나의 곤궁한 답변은 '그저 열심히 즐겁게 사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 스스로 말해 놓고 피식 헛웃음 짓는 일이 많아진다. 누가 봐도 답은 모호하지만, 이 질문은 만물의 영원한 화두로 남으리라.

어찌 늙는다는 것이 인간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자 아무도 없으리라.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휘어진 버드나무도, 푸른 이끼로 뒤덮은 바위도 피해 갈 순 없다. 화암사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욕심대로라면 산사를 편하게 오르고자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내고, 경치가 좋아 휴양지를 운운하며 숙소도 지었으리라. 그리되었다면, 지금의 산사는 지금 이대로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화암사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무생물인 절을 두고 '잘 늙은 절'이라고 극찬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잖은가. 아마도 그곳을 스쳐 간 도량 깊은 선인의 의지 덕분이리라. 선인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일찍이 깨우쳤고, 무욕(無慾)과 지족(知足)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공간인 절집이 자연스레 늙고, 그 정신이 이어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적묵당 마루에 잠시 앉아본다. 눈을 감고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던 원효와 의상대사의 고고한 자태를 떠올린다. 적묵당에 머물던 수행자와 극락전 처마를 멋지게 올린 장인의 숨결과 올곧은 정신을 느끼고 싶다. 천 년이란 시공을 초월해 그들과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선인의 정신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건 역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문명을 멀리하고 헛된 욕망을 비우며, 세상일에 초연해지는 일이 쉽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늙는다는 건 결코 서글픈 일만은 아니라는 걸, 오래된 절집을 오르내리며 깨닫는다. 삽상한 바람도 쉬어가는지 풍경 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 '잘 늙은 절', 안도현의 <화암사, 내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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