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3번 공유됐고 1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할인판매 마지막 날이라 마트가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아 계산대에서 20분이나 기다렸는데, 물건을 계산하던 직원이 호박 봉지를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아무리 봐도 애호박에 가격표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계산원이 무전기를 든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호박을 들고 급히 식품 판매장으로 뛰어 내려간 아르바이트생이 가격을 알아왔다. 바코드 없이 작은 쪽지에 쓰여 있는 호박 가격은, 오늘 정상가로 판매하는 가격의 절반인 팔백 원이다. 전날 팔던 것이지만, 오늘 들어온 것과 별다르지 않은데 반값이라니 그야말로 거저 들어온 호박 덩어리였다. 헌데 팔다 남은 것이라고 상품코드까지 없단 말인가. 가격표 없이 밀려나 있는 호박을 보니, 어쩌면 그렇게 우리네 인생과 흡사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코드는 상품에 이름, 제조회사, 가격 등을 표기하는 기호로 상품의 족보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 전산으로 계산하니 바코드가 없는 제품은 살 수조차 없다. 어느 제품이나 바코드 없이는 유통 또한 어렵다고 한다.

바코드가 있어야만 제품값을 계산할 수 있듯이 주민등록증으로 신분을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커피숍이나 주점에 가면 주민등록증을 내보여야 했다. 미성년자 출입을 금지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엔 주민등록증 하나로 신분확인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주민등록증의 소용 가치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은행이나 관공서에서의 업무 외엔 주민등록증을 사용하는 일이 줄었다.

박종희 약력

△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 제 17회 매월당 김시습 문학상 수상 등 다수

△ 저서 '나와 너의 울림' '가리개'

△ 충북여성문인협회 부회장, 충북수필문학회 촘무,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 사무국장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essay0228@hanmail.net
ⓒ 박종희
요즘은 사원번호가 등록된 신분증 한 장이면 신원이 확인된다. 군번처럼 하찮은 종잇조각에 적힌 일련번호가 그 사람을 대변하는 바코드가 된 셈이다. 결국은 바코드를 취득하려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수록 취업난이 문제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어렵다. 그만큼 구직자들은 직장 잡기 어렵고, 직장을 다니고 있어도 수시로 있는 명예퇴직제도 때문에 마흔이 넘어서면 위기를 느낀다.

입사하고 청춘을 직장에 다 바쳤던 한 지인은 동기들보다 승진이 빨랐다. 젊은 나이에 빠른 진급으로 대기업에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승진한 지 고작 2년 만에 퇴직해야 했다. 그 자리에 오르느라 아이들이 커가는 것도 모르고, 주말 한 번 변변하게 못 보내며 직장에 매여 살았는데, 어이없게도 책상 위에 명패가 바뀌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마흔이 넘어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을 그만두면 경제적인 부담이 크지만, 무엇보다도 신분이 상실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라도 퇴직하는 순간 직위가 없어진다.

평소에 뛰어난 카리스마로 직장에서 신뢰를 받았던 사람도 직장을 떠날 때에는 초라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바코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퇴사 후에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줄 명함이 없어 손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던 어떤 사람은, 직장이 없어도 명함 하나는 꼭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갈수록 세상이 좋아지니 이젠 바코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직장에서는 전자결재이니 사원번호가 입력된 바코드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하물며 어떤 직장에서는 매신저로 출, 퇴근 확인마저 한다 하니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그런가 하면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바코드가 없는 사람이 있다. 밀려난 호박처럼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사람이다. 같은 회사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면서 바코드를 부여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의외로 많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주민등록증 하나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바코드 때문에 신분의 차별을 받지 않는 시대였으면 한다. 굳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재래시장 모퉁이에 할머니의 손에 들린 애호박처럼 바코드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