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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큰딸과 시골 친정집에 잠시 들렸다. 밥상을 물리고 차 한 잔을 마시는 도중에 어머니가 슬그머니 일어나셨다. 건넛방에 장롱문을 열더니 주섬주섬 옷을 몇 벌 꺼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으셨다. 의아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오는 토요일 동창 모임 나가는 데 어떤 옷이 좋을지 모르겠다며 멋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옆에 있던 딸은 올해 팔순을 맞이한 할머니가 동창을 만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나 하듯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 또한 어머니에게 이날까지 '동창'이라는 단어조차 처음 들어본 듯하여 뜻밖에 생소한 느낌부터 들었다.

평생을 종갓집 맏며느리로, 고된 농사일로, 자식 뒷바라지로 분주하기 이를 데 없이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동안 하루라도 온전하게 어머니가 어린 시절의 옛 친구를 만나 동심에 젖어 여유롭게 웃으며 담소를 나눈 일이 있었는지. 내 기억으로는 좀처럼 떠올려지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친구들을 나이 팔십에 처음 만난다는 어머니 앞에 세월은 참 무상도 하다. 살아온 날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당신만의 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 모습이 마냥 소녀 같기만 했다.

아마도 거리가 먼 곳에서의 만남이었다면 아쉽긴 했어도 어머니는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시골 친구들의 번거로운 여러 사정을 생각해 도시에 사는 친구분들이 고향 가까운 곳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던 모양이다. 연륜이 더할수록 친구란 존재의 소중함이 더 애틋해져서일까. 거동이 불편할 수 있는 연세임에도 친구의 안부가 그리워 먼 길 마다치 않는 노년의 우정이 따뜻하다.

어머니가 친구들 만남에 옷차림을 고민하는 모습이 왠지 반갑기도 하고 아이처럼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지금보다 젊고 고우셨을 때 그런 기쁨과 설렘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더 아릿하게 다가왔다.

나는 딸과 작당하여 옷장에서 요즘 입을 만한 어머니 옷을 모두 꺼내었다. 그동안 딸, 며느리들이 사다 드린 옷이 적지 않게 걸려 있었지만, 그 중 모임에서 어머니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연출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어수선을 피웠다.

어머니는 우리가 모양과 빛깔, 구색을 갖춰 놓은 옷 몇 가지를 몸에 대보며 거울 앞에서 내내 쑥스러워하셨다. 아예 입어보시라고 성화를 부려도 '너희가 괜찮다 하는 걸 입고 갈란다' 하시며 손을 내저었다. 아마도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기력이 달리시는 듯 털썩 주저앉고는 '노인네가 주책없지'라며 싱긋 웃고 마신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머니 일평생 처음인 특별한 외출에 확실하게 기분 전환을 해 드리면 어떨까 싶었다. 친정 가까운 곳에 사는 작은 언니에게 몰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분명히 의도를 알게 되면 완강하게 거절하실 게 분명해 언니와의 저녁 외식을 핑계로 어머니를 읍내로 모시고 나갔다.

식당이 아닌 옷가게 앞에 차를 세우자 어머니가 한사코 내리길 거부하셨다. 겨우 달래듯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어머니는 괜한 돈 쓰지 말라며 망설이기만 하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꾸 어머니 시선이 연보라색 바탕에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머물고 계시는 듯했다. 언니와 내가 서로 눈짓을 나눈 후 빙빙 돌다가 그 옷이 어머니께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선수를 쳤다.

임정숙 약력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샘 동인

△청주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총무 역임

△청주·청원 1인1책 펴내기 운동 팀장

△저서 수필집'흔드는 것은 바람이다'(2009년)

△문학공간 수필부문 신인상. 2007청주예술공로상 수상

△limjs60@hanmail.net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출중했던 예전 어머니 미모가 되살아나는 듯 원피스는 정말 곱게 잘 어울렸다. 내친김에 신발가게로 어머니를 등 떠밀 듯 밀고 들어갔다. 편하고 시원해 보이는 흰색 샌들이 새 옷과 제법 맞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흰머리가 눈에 걸렸다. 미장원에서 염색까지 마치고 나니 십년은 더 젊어 보이셨다. 괜한 말해서 너희에게 부담을 주었다고 미안해하는 어머니였지만,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뭔가 할 일을 다한 듯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사실은 옷가게 탈의실에서 어머니 옷을 입혀 드리다가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었다. '우리 엄마 공주 같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기역자처럼 더 잔뜩 굽어 있는 어머니 등을 가까이서 바라본 순간 목에서 왈칵 뜨거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저 와락 어머니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모처럼 들뜬 어머니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눈치 없이 자꾸 눈자위가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괜한 호들갑만 떨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 우연히 외국영화를 보다가 '오드리·헵번'이란 여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벽에 걸린 가족사진 중에 어머니는 한복을 입으셨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갸름한 얼굴, 깊고도 또렷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이 꼭 오드리 헵번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구들한테 오드리 헵번이 우리 엄마를 닮았다고 자랑을 하고 다닌 기억이 난다.

흑백사진 청초했던 어머니 모습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바람 불면 한 줌 마른 나뭇잎처럼 훅 날아갈 듯 작아진 어머니가 애처롭다.

세상 들녘, 고요하고 순박한 할미꽃이 되어버린 나의 어머니, 슬프지만 아름다운 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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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