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1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해마다 24절기 중 첫눈이 내리는 소설(小雪) 무렵이면 가슴 한곳이 시리고 아파지는 그리움의 늪으로 빠져든다. 남편이 공직생활을 마감할 무렵 서울 본부에서 근무할 때 조그만 오피스텔을 마련하여 내 나이 이순에 어설픈 신접살림을 할 때였다.

오빠가 "놀라지 말고 내려오라."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식을 전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 분이 아니심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너무도 황당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어머니는 별다른 심각한 병환 중이 아니었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 새벽 혼자 눈을 감으셨단다. 오빠 내외와 함께 사셨는데도, 안방에서 기거하는 오빠 내외는 건넌방 어머니가 먼 세상으로 가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목욕탕 흔적으로 보아 새벽에 목욕하신 것을 알 수가 있었다며, 허탈한 표정으로 말해 주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77세의 일기로 고독하게 홀로 쓸쓸히 임종을 맞으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독실한 불교 신자로 사셨다. 늘 죽음의 복을 위해 정갈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기도하며 절에 다니셨다. 그래서인가 세상을 마치는 그 시간을 어찌 그리 아셨을까. 당신 몸을 깨끗하게 씻으시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셨으니. 부처님의 가호가 어머니께 내렸는가 싶었다.

김정자 약력

청주 출생

『한국수필』등단

청주시문화공로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청주예술공로상, 홍은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수필집『세월 속에 묻어난 향기』,『어느 해 겨울』, 『41인 명작품 선집』

다산의 세월에 사신 어머니였지만 오로지 남매만을 낳으신 나의 어머니!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아선호사상이 뛰어나 딸에게만은 따스한 정을 겉으로 내색 한번 못하신 체 평생을 고달프게 사신 나의 어머니! 여자로 태어나면 자라서 남의 집 귀신이 된다며 따스한 눈길 한번을 주시지 않으셨다. 어린 마음에 난 주워온 딸인지도 모른다며 늘 찔끔거리며 자랐다.

어머니는 노후를 6대 독자인 오빠 내외와 살면서 늘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사셨다. 외며느리인 올케언니의 눈치를 살필때 마다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외동딸인 나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하나뿐인 딸에게 하고 싶고 남기고 싶은 말이 그리도 없었을까? 어머니는 그렇게 냉엄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딸을 찾지 않은 체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뜨시기 일 년 전의 일이다. 예상치 못 한 일이 일어났다. 개나리 봇 집만 한 보따리를 들고 내 집에 오셨다. 의아하여 "엄마 우리 집에서 주무시려고?"라고 여쭈었더니 "그래! 며칠 딸네 집에서 나도 지내고 싶어 왔다."라고 하셨다. 의외의 상황에 웬 횡재인가 싶어 기쁜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어머니께 정성을 다했지만, 일주일을 못 넘기고 당신 사시는 오빠 집으로 가셨다. 역시 몸담아 계신 곳이 편하단 생각이셨나 보다.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우리 집 거실에는 중국산 대형 실크 카펫이 있다. 그 카펫 가장자리에 수술이 늘어져 있는데 그 수술을 세 가닥을 잡아 곱게 머리 땋듯이 수천 개는 되도록 예쁘게 매만져 놓으셨다. 눈도 어두운데 어찌 그리 가느다란 실크 수술을 곱게 땋아 놓으셨을까. 그 수술을 땋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쩌면 어머니는 딸에 대한 마지막 사랑의 표시를 그렇게 수놓은 것이리라. 내 생전에 어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낸 흔적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아무리 딸자식을 멀리하는 것이 딸의 행복을 위한 일이고, 어머니로서 잘사는 여인의 삶이었다손 치더라도 이 세상 하직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 딸 좀 불러다오"라는 말 한번을 못하셨는지. 그 한마디도 아끼고 어머니만의 특이한 사랑법을 끝내 지키시기만 한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그 사랑법은 나에게 특효약이 되어 이렇게 평화로운 내 가정과 행복한 노후가 보장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 일을 꼽으라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이다.

얼마나 아팠으면 소리한 번 내지 못하시고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을까. 저승길로 떠나실 때 혼자서 무섭지는 않으셨는지? 가슴이 미어진다. 오로지 딸 하나인 나에게 세상을 마치는 그 날, 끝내 말 한마디 못하신 그 가슴은 까맣게 타 있었으리라.

그렇게 다시 부르지 못할 나의 어머니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 시 던 날! 딸의 통곡소리는 저승까지 간다고 하였던가. 대성통곡을 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한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의 의미, 홍수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은 돌이킬 수 없는 때늦은 후회가 되어 가슴속에 피멍으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장 아프고 그리운 나의 눈물이 되었다.

평생을 아들만을 자식이라 여기시며 딸은 저편에서 바라만 보던 나의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가 너무도 보고 싶다. 포근한 어머니 품에 꿈에서라도 안겨 보고 싶다. 그리고 끝없이 용서를 빌고 싶다. 세월은 흘러 내 모습도 어머니가 떠나시던 그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캄캄한 밤, 차창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이 너무도 어머니를 똑 닮아 나도 모르게 소스라쳐 놀란다. 나는 엄마 딸임에 틀림이 없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樹慾靜이나 風不止하고),

자식은 봉양하려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네(子慾養이나 親不待니라)'.

고사성어를 떠올려본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