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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효소를 담갔다. 큰 유리병에 적당히 굵고 매끈한 무 여섯 개를 넓적넓적하게 썰어 설탕과 무의 비율을 1:1로 켜켜이 얹어 꾹꾹 눌러 담고 공기가 통하도록 한지로 뚜껑을 덮었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질을 높이는 참살이문화가 번지면서 효소 담는 것이 유행된 것 같다. 나도 해마다 매실이나 양파효소는 담갔지만, 무효소를 만들기는 처음이다. 기관지가 안 좋아 고생하는 내게 무효소가 기관지와 감기에 좋다고 지인이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효소는 싱싱한 유기농 재료로 정확한 비율을 지켜 담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효시키는 것이 더 큰 일이다. 다음 날부터 아침저녁으로 베란다에 내놓은 효소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것도 일이었다. 효소를 담가도 설탕과 재료의 비율이 맞지 않거나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저 설탕에 절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용물도 수시로 섞어 주어야 설탕이 잘 녹고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열흘이 지나니 설탕이 거의 녹고 무에서 제법 물이 생기고 무 조각 위로 뽀글뽀글하게 거품이 일었다. 드디어 발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설탕이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되어 효소와 섞이며 에너지와 가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마치 기대하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흐뭇하고 기특해서 큰 나무주걱으로 여러 번 저어주었다. 이때 거품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잘 저어주어야 당을 분해하고 효소의 단맛도 줄어든다. 효소를 만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효소 담는 일도 아이를 키우는 일과 같지 않나 싶다.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 그런지 발효가 빨랐다. 효소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쪼글쪼글해진 무가 위로 떠올랐다. 오그라들어 꼭 무말랭이 같은 무를 꺼냈다. 설탕에 절어 달긴 하지만 버리려니 아까워 반은 식초와 소금, 청양고추를 넣고 무 피클을 만들고 반은 고추장과 된장에 버무려 장아찌를 만들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버리는 것이 아까워 만들었는데 잘 삭혀서 먹어보니 밥 도둑이 따로 없었다.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피클은 딸애가 잘 먹고 고추장과 된장에 박은 장아찌는 남편이 잘 먹었다. 그러고 보니 무 효소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3개월이 지나고 나서 작은 유리병으로 옮겨 담아 다시 3개월 동안 후발효를 시키고 나니 무효소가 완성되었다. 뜨거운 물에 효소 한 숟가락을 넣어 먹어보니 단무지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먹을수록 맛이 좋았다. 무 효소는 나처럼 기관지가 약한 사람에게도 좋지만, 특히 소화가 안 될 때 먹으면 기가 막히게 잘 내려갔다. 효소를 담글 때 딸애와 남편이 몸도 약한 사람이 사서 고생한다고 걱정하더니 만들기를 잘했다고 한마디씩 했다.

박종희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제3회 서울시음식문화개선 수필공모전 대상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등 다수

△ 저서 '나와 너의 울림' '가리개'

△ 충북여성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 사무국장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 박종희
제대로 발효되어 먹을 때마다 신통한 효력이 있는 무효소를 보면서 딸애를 키우던 때가 생각났다. 임신하고 유난히 길고 심한 입덧 때문에 딸애는 하마터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뻔했다. 태어날 때 살집 하나 없이 키만 크고 약골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딸애는 잔병치레 없이 잘 자랐다. 그렇게 병치레 없이 커 준 딸애도 한 번씩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다.

딸애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건강하게 학교에 잘 다니던 딸애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커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같은 반 친구들은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해 벌써 미래의 계획을 세웠는데, 자기는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딸애 때문에 남편과 나도 덩달아 고민에 빠졌다. 아직 어리니 지금은 학교생활 잘하는 것이 네가 할 일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딸애는 한동안 우울하고 재미없는 시간을 보냈다.

대입을 앞두고도 딸애는 인생에 대한 의문으로 위태위태한 나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딸애와 같이 성장 통을 앓았다. 밤새 잠 못 이루는 딸애하고 엉킨 실 뭉치를 꺼내어 풀며 딸애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순간순간은 아찔하고 힘들었지만, 그때가 딸애한테는 발효의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무 효소가 자연스럽게 발효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딸애도 자라면서 그렇게 효소의 활성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범대학에 입학해 교사가 되겠다고 했던 딸애가 6개월 전에 다시 진로를 바꾸었다. 딸애는 요즘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교사의 고충과 다들 귀하게 자라 개성이 강한 아이들을 잘 가르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처음엔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고 시기적으로도 좀 늦은 결정이라 고민했는데, 결국 우리 부부도 딸애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딸애는 요즘 종일 책과 씨름 중이지만 편안한 얼굴이다. 잘 숙성되어 몸에 좋은 무 효소처럼 딸애도 위기가 있을 때마다 슬기롭게 대처하여 발효과정을 잘 거친 덕분이리라.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된 딸애는 아직도 발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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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