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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승용차가 없어도 느긋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지금처럼 바쁘지도 않았었다. 퇴근 후에 동료와 안주 없는 술이나마 한 잔 마시고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해도 시간에 쫓기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주로 승용차를 타고 다니니 '퇴근 후에 소주 한 잔'은 쉬 꺼낼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설사 음주운전을 단속하지 않는다 해도 술을 먹고 운전할 수는 없다. 모임이 있는 날은 아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하는데 시내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다. 5분, 10분이 지나가면 짜증이 나고 그러다가 택시를 타게 된다. 그러면서도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시간을 금쪽같이 아꼈나?'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 생각은 잠시 스쳐 지나가고 만다.

어느 날, 모임에서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와서 시내버스를 탔다.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허전한 것이 아무것도 집히지 않았다. 가방에도 없었다. 이럴 수가! 생각은 사무실에 있는 책상으로 줄달음쳤다. 주머니에 넣으면 불룩해지고 보기 싫어 외출하지 않을 때는 흔히 지갑을 서랍에 넣어두는 것이 나의 습관이다. 그날도 어느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고서 지갑을 서랍에 넣어둔 채로 퇴근하였으니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술을 먹지 않았다면 모를까. 술까지 마시고 시내버스요금도 없이 차를 탄 승객을 운전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입에서 술 냄새는 확확 풍기고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을 내 모습에 차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엉거주춤 빈자리를 찾아 가방을 놓고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저 기사님 지갑을 책상 서랍에 놓고 그냥 나오는 바람에…"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얼마나 유념성이 없으면 시내버스 요금 천백 오십 원이 없어서 저럴까?' 하며 모든 승객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운전사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박순철

충북 괴산 출생
동양문학 신인상 당선(1990년)
월간『수필문학』천료(1994년)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문학회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
운전사의 표정으로 봐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죄송합니다.' 마치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자 운전사는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운전만 계속한다. 우리 동네에 이르러 내가 가방을 들고일어나자 운전사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요금통에다 넣고 있었다.

내리면서 '다음에 꼭 갚아드리겠다'고 약속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차 번호를 깜빡 잊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어제저녁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낡은 내 애마를 타고 출근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내가 그랬다. 하긴 모든 것을 다 기억하다가는 세상살이가 그만큼 피곤할 것이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나쁜 일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그 꼴이었다. 일부러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 꼭 갚아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하루는 퇴근 무렵에 갑자기 고향 친구가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차를 직장 주차장에 그냥 두고 나가서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이 흐뭇하도록 술을 마셨다. 차를 운전하고 못 갈 정도는 아니겠으나 음주운전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버스가 금방 오면 타고,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타야지' 하고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마침 시내버스가 오기에 탔는데 지난번 술 먹고 탔을 적에 요금을 대신 내준 그 운전사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먼젓번은 정말 고마웠습니다.'나는 속으로 오늘은 전날 진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하고 지갑을 꺼냈다. 잔돈도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는 것은 후줄근한 만 원권 몇 장, 난감하기는 지난번보다 더했다. 세상에 누가 시내버스 요금을 만 원권으로 낸단 말인가.

교통카드 대신 현금 내는 사람을 위해 동전을 준비해놓고 거슬러주고 있긴 하지만 천백 오십 원의 요금에 만 원짜리를 낸다는 것은 눈총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지난번의 일도 있고 해서 돈을 꺼내 들고 '이것으로 지난번 요금까지 계산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며 지폐를 요금통에 넣으려 했더니 운전사가 얼른 요금 통 입구를 손으로 막으며 "다음에 내십시오." 한다. 상습적으로 무임승차를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간사할 수가 있을까. 조금 전 그 돈을 다 내어도 아까울 것 같지 않더니 운전사의 말을 듣는 순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이천삼백 원 때문에 만원을 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 원권 지폐는 다시 내 지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버스요금의 몇 곱절로 갚아야지 하면서도 작심삼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껏 내가 빚지고 신세진 사람이 비단 버스 기사 한 사람뿐이겠는가. 모두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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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