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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에는 1962년 최고의 스타로 불리던 최무룡 김지미 주연의 영화 주제가 '외나무다리'의 전주곡이 흐른다.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 사이로 나비가 나는 모습은 정말 내 고향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복사꽃 능금 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의도적인 일은 아니었다. 형의 눈물을 보려고 했던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 노래는 직장 선배인 형의 애창곡으로 이미 내 머릿속에 굳어있기에 무심코 그랬을 거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르는 형의 모습이 무척 애절하게 느껴진다.

형은 보릿고개 넘기가 저승길보다 더 무섭다던 시절, 그 가난을 이기고자 월남 전투에 자원한 참전 용사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용케 살아남아 귀국한 후에 월남에서 번 돈으로 농토를 장만했다고 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 그 앞을 졸졸거리며 흘러가는 냇물, 고샅을 벗어나면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들어선 밭 가장자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알뜰살뜰 성실하게 농사짓는 형을 마을 사람들은 건실한 청년이라고 믿음직해했다. 훌륭한 신랑감으로 여겼는지 형을 탐내는 동네 처녀들의 눈길도 자주 받았다.

봄바람이 귓전을 간질이고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형은 이웃집 처녀와 복숭아나무 밑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알뜰하게 살림하고 저축한 아내 덕에 농토도 마련하고, 성실한 군 생활을 인정받아 향토예비군 중대장의 중책까지 맡을 정도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딸만 넷을 낳았지만,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형의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막내딸을 낳다가 그만 명을 달리했다. 그 슬픔을 어이 말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마냥 슬픔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암죽을 끓여놓고 들일을 나가며 큰딸에게 막내를 부탁했다. 큰딸이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5학년이니, 형은 일하는 틈틈이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자니 농사일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나가던 직장(향토예비군 중대장)도 접었다.

큰딸도 고생이었다. 어린 손으로 조석을 끓여 먹으며 학교에 다녀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고…. 정말 사는 게 고역이었다. 엄마 젖 한번 물어보지 못한 핏덩어리는 잔병치레도 잦았다. 울며 보채는 딸을 안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늘어날수록 죽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철모르는 딸들만을 남겨두고 차마 죽을 수는 없었다.

주위에선 새 식구 맞을 것을 권유했지만, 올망졸망한 딸들이 불쌍해 자신의 인생은 뒷전이었다. 사랑하던 아내를 앗아간 고향도 싫어졌다. 그럴 즈음 새로 얻은 직장을 청주로 옮길 기회가 왔다. 아내가 잠들어있는 곳을 떠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딸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큰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나보다 네 살 많은, 이미 마흔 고개를 넘은 형의 가정사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비록 술기운을 빌었지만, 걸어온 길을 힘겹게 털어놓을 때는 내 가슴도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제야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차가운 표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마침 비슷한 처지의 여인이 주변에 나타났다. 나는 형이 그 여인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 하늘의 뜻이었는지 두 사람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다.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형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형의 딸 결혼식 때마다 방명록 관리를 했다.

첫째 딸 결혼식이었을 거다. 신랑 집이 외지인 까닭에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버스도 밀리고 지루하니까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혼주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했다. 인사말이 끝나자 기왕이면 노래도 한 곡 하라고 했다. 혼주가 노래 한 자락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형은 노래방에 가면 꼭 부르던 노래, 외나무다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1절이 끝나기도 전에 형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가 싶더니 다음 노랫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맏딸을 시집보내는 경사스러운 날 신부 친엄마의 빈자리와 고생하며 자란 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서일 게다.

그날 이후로는 노래방에 가서도 그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했다. 어쩌다 내가 습관대로 '외나무다리' 노래를 입력해놓으면 마지못해 부르긴 하지만 꼭 눈물을 보였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다더니 엄마 젖 한번 물어보지 못하고 자란 막내딸도 어느새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았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래서인지 형이 오늘은 '외나무다리'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정말 세월 속에 모든 슬픔을 날려 보냈나 보다.

박순철 약력

충북 괴산 출생
동양문학 신인상 당선(1990년)
월간『수필문학』천료(1994년)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문학회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

경북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 무섬마을 홈페이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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