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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영산에서

도명산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숨고르기 한 번 없이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 정상은 아니지만 보기 좋은 바위가 있고, 정상보다 널찍하고, 잘 생긴 소나무가 있는 곳이 있다. 전망도 좋다. 북쪽으로 숲 사이에 도명산이 희끗희끗 얼굴을 내밀고, 동으로 미륵산성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 남으로는 멀리 속리산 줄기들이 줄기차게 뻗어 있다. 그 골짜기 사이로 녹두빛 들판이 풍요롭고, 무더기로 늘어선 마을이 한가하다. 무엇보다 바로 발아래 공림사 잿빛 기와지붕과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길가에 노란 은행나무가 그림 같다.

낭떠러지 바위 끝에 몇 그루 소나무는 재주 있는 사람이 먹으로 툭툭 쳐놓은 것처럼 고풍스럽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느라 밑동이 굵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키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가지가 한 15도쯤 축축 쳐져 있어서 보는 사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엷은 솔잎에 맑은 햇살이 부서진다. 여기 학이라도 몇 마리 앉아 있다면 금상첨화겠다고 욕심을 부려 본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이다.

평평한 바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시원하다. 문득 소나무가 부러웠다. 사방이 탁 트인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아래 세상을 밤낮으로 내려다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이 소나무는 얼마나 큰 복인가? 같은 소나무이면서도 어느 것은 구렁에 서서 볕은 생각조차 못하고, 어느 것은 이런 높은 곳에서 볕을 받으면서 좋은 세상을 조망하고 사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자연의 일이나 인간사나 불공평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방주 약력

청주출생, 1998년 '한국수필' 신인상충북수필문학상(2007),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내륙문학 회장 역임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여시들의 반란' 편저 '윤지경전' (주식회사 대교)

공저 '고등학교 한국어'

현재 충북고등학교 교사

낙영산 전망

ⓒ 이방주
노인들이 올라왔다. 떠들썩하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마도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할 모양이다. 한 노인이 내 앞을 지나 소나무에게 간다.

"야 전망 좋으네. 경관이 그만이고만."

그러더니 한 마디 더 한다.

"소나무야, 니도 이만큼 크니라 고생 참 마이 했데이. 바위틈에서 사니라고 물 한 모금 모 얻어 묵고 을매나 고생스러벘을꼬? 세상 참 불공평하고마. 고로케 고생 했으이 요론데 뿌릴 내리고 살지. 니는 고생 마이 하고 내는 눈에 복이 터짔데이."

심오한 철학을 담은 시 한편을 읽은 기분이다. 섭리를 담은 수필 한 편을 읽은 듯하다. 귀가 어두워져야 세상 얘기가 잘 들리듯, 눈이 어두워야 세상 돌아가는 철리가 더 잘 보인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것은 노인의 눈이다. 그것이 되어 보아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그것이 되어 보는 것은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보는 소나무와 노인이 보는 소나무가 이렇게 다르다. 높은 곳에 있는 소나무를 대중없이 부러워한 내가 부끄럽다. 나는 우두머니가 되어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일상으로 돌아가 친구가 차린 점심상으로 간다. 방금 사람을 경악하게 화두는 다 잊은 모양이다. 그것도 그냥 일상인 모양이다. 노인들은 모두가 문인이고 철학자이다.

2. 도명산에서

정상에는 찬바람이 분다. 부부인지 젊은 남녀가 서로 어깨를 기대고 김밥을 먹는다. 조금만 내려서면 바람을 막아주는 소나무가 있지만, 서로의 체온은 싸늘한 바람도 잊게 하는가 보다.

도명산 소나무

ⓒ 이방주
정상 바로 아래에 한 무더기의 소나무가 보기 좋다. 나는 이 소나무들의 고고한 모습에 반한다. 커다란 바위를 피해 무리지은 자연의 배치가 조화롭다. 밑동은 굵직하지만 키는 작아 살아온 햇수를 가늠하기 어렵다. 앞에 서 있는 한 그루는 크고 늠름하다. 뒤에는 보다 작은 몇 그루를 제자인지 벗인지 거느리고 있다. 바위틈에 살아왔으면서 가지도 많고 잎도 무성하다. 가지가 키에 비해 옆으로 길게 벋었다. 가지마다 잔가지가 소복하다. 다른 소나무들도 크기는 달라도 모두 한 모습이다. 어른을 닮아가는 아이들처럼 그 모습이 경이롭다. 화목한 가족 모임이라 할까 임금을 모시고 경연(經筵)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햇살은 따스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분다. 땀을 흘리며 올라온 사람들은 추워하는데 소나무는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가지마다 푸른 솔잎과 함께 금침(金鍼) 같은 바늘을 안고 있다. 이제 작별할 시간인데도 아직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계절에 소나무들도 아쉬움을 느끼는가 보다.

우리는 한 젊은이에게 부탁하여 정상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썰렁한 바위보다 따뜻한 소나무를 더 좋아하는 눈치이다. 나는 아내에게 '소나무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고고하기 때문에 나무 목(木)자에 귀인 공(公)자를 붙여 송(松)이 되었다.'는 것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나무 중에 귀인인 소나무가 은근히 부러워졌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다.

그때 아내에게 아들의 전화가 왔다. 저녁 약속을 하는 것 같다. 아내가 통화하는 동안 나까지 훈훈해졌다. 생각해보면 내게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제자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벗, 나를 좋아하는 벗, 내가 사랑하는 제자, 나를 따르는 제자가 있다. 모두 나의 벗이다. 공자가 학문의 벗을 두었다면, 나는 삶의 벗을 두었다. 세종대왕이 학문의 벗으로서 신하를 두었다면, 나는 삶의 벗으로서 가족을 두었다. 내가 벗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면 그가 진정한 벗이다. 벗에게 베풀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가 진정한 벗이다.

내려오면서 돌아보니 소나무에 내리는 햇살이 참 곱다. 가을 저녁 햇살은 단풍에 붉기를 더하고 계수(溪水)에 쪽빛을 더한다. 아내와 이야기로 여유를 누리며 걸었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청아하고, 솔잎에 스치는 바람은 향기롭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다가오는 솔바람 물소리에게서 벗은 이로움을 버리고 순결한 마음으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사귐을 길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진리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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