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3번 공유됐고 1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뒷집에 6·25 전쟁에 참여했던 향년 여든이 넘은 참전용사가 살고 있다. 나는 감히 이 어른을 용사라 부른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용사와 나는 부락 모임의 회장과 총무라는 인연으로 자주 만나고 술도 가끔 마신다. 용사는 술이 거나해지면 6·25 전쟁 때 공산군과 싸웠던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이 이야기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용사와 같이 있으면 돌아가신 큰 형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용사의 연배와 비슷하다. 형님은 6·25 전쟁 때 적과의 접전이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실탄과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이 벌어져 인민군의 대검에 대퇴부를 찔려 후송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용사와 같이 있으면 큰 형님을 뵙는 것 같아 조심스럽고 존경심도 우러난다.

어느 날 용사의 집을 방문한 네게 "국방부에서 뭘 좀 써 달라는데 쓸 줄을 알아야지" 하면서 내미는데 보니까 참전 수기를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반세기저편의 기억을 되살리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용사는 열아홉 살 때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 기나긴 보릿고개 넘기가 어려워 밥만 먹여주면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당시는 해방직후라서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져있었고 국군이 창설 될 때였다.

훈련은 무척 힘들고 엄격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용사는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할 때도 있었다. 완전군장을 하고 매일 40km 씩을 달렸으며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자원한 군에서는 배불리 먹기는 고사하고 퍼들퍼들 날아 갈 것 같은 통 밀 삶은 것을 먹고 나면 소화도 되지 않을뿐더러 화장실에 가보면 멀겋게 그냥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용사가 6·25 전투에 참가했던 이야기를 할 때는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나는 군대를 가지 못했다. 신체검사 시에 내 체격은 남에게 비해 그리 뒤떨어지지 않았고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군의관은 을종 보충역 판정을 내렸다. 사실 당시는 군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겁쟁이였던 것도 사실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사나이로 태어나 군대에 갔다 오지 못한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격이 되고 말았다.

용사는 전투 했던 곳의 지명과 일자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메모라는 것은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했었지 농사짓다가 입영한 사람에게는 한갓 사치스런 행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용사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군부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은 6·25 전쟁 때 용사가 세운 혁혁한 전과로 무공훈장 수훈자로 선정되었으나 지금까지 전수되지 못하고 보관되어 있으며 6·25 기념일을 맞아 모 육군부대에서 전수할 계획이니 꼭 참석해달라는 부탁에 어리둥절했단다. 제대한 지가 50년이 넘었고 그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당시 받지 못한 훈장이 보관되어 있다니 꿈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용사는 그 날 참석해서 두 개의 훈장을 받아왔다. 자녀들도 아버지의 훈장을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현역 생활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더없이 존경스럽고 부러운 것이기도 했다. 50여 년이 지난 옛일을 들춰내 전수해주는 당국과 군에 대한 신뢰성도 함께 느껴졌다.

용사의 이야길 듣고 있으면 끝이 없다. 어느 때는 눈 쌓인 험준한 산을 오르는가 하면, 분대원 들에게 맡기기보다는 용사가 설치하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다는 판단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한 이야기도 생생하다.

피아간의 공격이 치열할 때 용사는 육군하사의 계급을 달고 철원을 지나 개성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다가 포위되어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영하 20도 씩 내려가는 전방고지에서도 속내의를 모르고 살았으며, 얼마나 담대했는가는 전쟁이 없을 때 전우들이 용사를 가리켜 "총알이 무서워서 피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순철 약력

충북 괴산 출생
동양문학 신인상 당선(1990년)
월간『수필문학』천료(1994년)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문학회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

용사는 장롱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이것이 내 보물 1호야.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기도 하고" 나는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군번과 부대 표식이었다.

50여 년이 지난 세월동안 보관하고 있는 것도 용했지만 얼마나 자주 꺼내봤으면 녹 하나 슬지 않았을까. 용사는 군번을 목에 걸어보며 감회에 젖는 듯 했다.

"내가 이 군번을 목에 걸고 다닐 적에는 훨훨 날아 다녔었지. 무서운 게 없었어. 젊어서 총 들고 싸웠던 곳을 다시 가보는 게 나의 유일한 소망이야. 그곳에 가서 전우들의 명복도 빌고 싶고…" 용사의 눈에서는 어느새 이슬이 촉촉이 맺힌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 깊이, 또는 장롱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가슴속에 간직한 것은 은밀한 사연일 수도 있고 가슴 뜨거운 추억이나 잊지 못할 슬픈 사연들일 것이다. 반면 장롱이나 은밀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값진 보석이나 등기권리증, 주로 재산이나 돈과 관련되는 물건들이 주류를 이룰 것이지만 용사는 군번을 정말 보물 같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