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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3.03 18:11:1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모처럼 카랑카랑한 날씨이다. 난 동면에 든 개구리처럼 꼼짝하기 싫은데 남편은 여행을 가자고 한다. 추운 날씨에 강바람까지 불면 얼굴은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킬 게 뻔하다. 마치 식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피부에 두드러기가 돋아 약간의 통증과 가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니 어찌 마음 놓고 콧바람을 쐬러 가겠는가.

겨울여행을 수년째 보류한 상태다. 올해는 남편에게 미안하여 어디로든 바람을 쐬러 가야 할 것 같다. 남편이 산을 좋아하니 내 몸 상태를 고려해, 여느 산행보다 수월한 제주도 오름으로 결정한다. 거친 바람도, 두드러기도 불사하기로 한다.

나는 여왕을 만나러 성문 초입에 와 있는 거다. 오름 중에서 여왕의 칭호를 얻은 다랑쉬오름. 가파른 오름을 바라보니 설렘도 잠시 한숨이 절로 난다. 오름에 약하디약한 나이다. 산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올 땐 어려운 걸 모르겠는데, 산이 조금만 높아도 호흡이 어려워 헉헉대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비탈진 오름을 허정거리며 오르고 또 오른다. 누가 봐도 내 모습은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오르는 꼴이다. 이 오름은 여왕의 자리가 아닌가. 신하가 여왕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허리를 반쯤 숙이거나 아예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예를 갖추는 건 신하된 도리이다. 그러니 기어오르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리 자신을 위로하며 오르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정상에 올라 움푹 팬 분화구 크기를 보고 놀란다. 그 주위를 도는 데 이십여 분이 걸린다니 둘레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분화구 지름이 상당하여 한 컷의 필름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과연 여왕의 자리는 대단하다. 자리가 자리니만큼 바람을 피하여 앉아 은은한 홍차를 나누는 격식을 차려본다. 이내 일어나 둘레를 걷기 시작하니 바람이 휘몰아친다. 강바람에 몸이 흔들거린다. 차라리 바람에 실려 밑바닥으로 굴러가 눕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깊고 넓은 곳, 저 바닥은 드러나지 않는 어머니 품속처럼 고요하며 아늑하리라.

내 시선이 분화구 아래로 꽂힌 걸 본 남편은 어서 가자고 서두른다. 한참을 걷자니 은빛 소사나무 숲길로 든다. 마치 나무들의 사열을 받는 듯싶다. 나무는 위로 크지 못하고 아랫도리가 도톰하며 서로 에워싸듯 몽밀하다. 바람을 얼마나 맞았는지 가지의 몸빛이 허옇게 세어 눈이 시릴 정도다. 역시 여왕의 후광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가 보다.

이은희 약력

· 2004년「월간문학」등단
·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충북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수상 외 다수.
·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 편집위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외 활동.
· 저서로「검댕이」외 3권 수필집 출간
· 현재 (주) 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중
ⓒ 이은희
여왕을 영접하느라 긴장했던지 나는 기진맥진이다. 그래도 올라야만 한다. 다랑쉬오름 정상에서 본 아끈다랑쉬오름은 작고 아담하다. 과연 다랑쉬오름의 버금간다. 아니 축소판이다. 여왕의 딸은 공주가 아니던가. 그래, 아끈다랑쉬오름은 공주이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다. 내 주위엔 먹을거리도 먹을 곳도 없다. 결혼기념을 자축하는 여행이 아닌 극기훈련이다. 쫄쫄 굶은 상태로 공주를 알현하러 나선다.

역시 여왕을 보러 가던 길보다 가벼운 마음이다. 눈발이 뜨음하다. 유채꽃 핀 돌담을 스쳐 지나간다. 한겨울에 핀 유채꽃과 돌담의 색감은 참으로 조화롭다. 그 길로 십여 분을 오른 정상은 드넓은 억새밭이다. 어디가 분화구인지, 둘레인지 모를 정도로 억새가 지천이다. 물기를 잃은 억새는 바닥에 드러누워 하얗게 빛을 발한다. 눈이 부시다. 이 또한 바람 탓인가.

오름이 작다고 얕보았던가. 맥없이 걷다가 덩굴줄기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바로 일어설 수가 없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억새밭에 누우니 편안하다. 순간 무아의 상태에 든다. 무의식과 의식은 한 공간에 존재하던가. 이어 통증이 느껴진다. 카메라를 보호하느라 무릎과 팔꿈치에 육중한 체중을 실었나 보다. 맥이 풀린 것은 기운이 없다는 것, 밥심이 없어서다. 어서 내려가 배를 채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시장이 반찬인가. 컵라면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일은 처음이다. 라면 힘으로 세 번째 오름인 용눈이오름으로 달려간다.

용눈이오름은 용이 누운 형상이란다. 구불거리는 능선이 여인의 젖무덤처럼 부드럽고 완만하다. 완만한 곡선의 아름다움은 여유와 품위를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난 오름의 기울기가 크지 않아 숨을 헐떡이지 않는다. 다랑쉬오름과는 다르게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한 길이다. 느리게 걷다 보니 어느새 능선을 하나 넘고 있다.

하늘 가까이 다가간다고 느끼자 바람의 세기도 달라진다. 옆 지기의 팔을 잡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성싶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듯 사납게 달려드는 바람. 바람에 맞서 나가는 일도 어렵고, 자리를 지키기도 어렵다. 바람이 잦기를 기다릴 뿐이다. 내가 바람의 세기를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바로 곁에 풍력발전소가 있다는 걸로 그 세기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오름에서 바람을 제대로 맞은 여행이다. 기어가고, 넘어지고, 내 의식이 바람에 산산이 부서진 날이다.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오름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연 앞에선 날이 선 감정도 자존심도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니라. 감히 조언한다. '누구든 바람 쐬러 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용눈이오름에선 그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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