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살펴보니 우산살 끝과 천 매듭이 하나 풀어져 있을 뿐이었다. 바쁜 시간에 딸 눈치가 보였지만 재빨리 실로 꿰매어 놓으니 멀쩡하기만 하다. 딸은 금방 환해져서 '수선비는 외상입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고는 서둘러 나간다.
오래전 할아버지 모습이 흑백 사진처럼 떠오른다.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그리고 부모님, 우리 육 남매 대가족이 살았었다. 식구가 많으니 비가 오는 아침은 당연히 우산 전쟁이었다. 자칫 게으름을 피우다간 학교에 갈 때 제대로 된 우산을 쓰고 가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그나마 성한 우산을 차지하려고 티격태격 언니, 오빠, 동생들과 다투다 결국 밀리기 일쑤였다. 그럴 땐 우산살이 반쯤 펴지다 말거나 한쪽이 기울여져 반달모양인 채 쓰고 가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디 구석에 있는 비닐우산이라도 눈에 띠어 급히 들고 나가다 보면 얼마 못 가서 낭패다. 거센 비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훌렁 뒤집어져 대책이 없다. 교실에 들어갈 땐 비 맞은 생쥐가 따로 없다. 처량 맞아 보이는 행색이 창피해 은근히 부아가 일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집집마다 우산쯤이야 넘치겠지만 내가 어렸던 그 시절도 모두 형편이 넉넉지 않은 때였다. 그러니 우산도 맘먹고 사야 할 일이었다. 더욱이 새 우산이 생기면 그 차지는 형제 서열로도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선지 특히 여름 장마철엔 할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은 가족들이 사용했던 고장 난 우산을 수시로 고쳐 놓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급할 때 우산 보급이 식구 수대로 원활하지 않으니 그 대처방안이셨을까.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 연장 도구 상자를 펼쳐 놓고 망가진 우산을 살필 때마다 꼭 의사 같았다. 어디를 수선해야 할지 이리저리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것까지도 늘 익숙한 광경이었다. 진단이 내려지면 나름의 처방이 시작된다. 할아버지의 그 섬세한 눈썰미와 노련한 솜씨로 손색없는 우산이 다시 만들어질 때마다 재미있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나였지만 조숙했었는지 노란 삼베적삼을 입은, 우산을 고치는 일에 전념한 할아버지 옆모습을 우연하게 볼 때마다 그저 시골 평범한 노인의 면모는 아니란 생각이 곧잘 들곤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안경 너머 풍기는 할아버지 눈빛은 뭔가 남달라 보였다. 지금의 표현대로라면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고 할까. 이상하게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개성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종종 근사해 보이기도 했다.
동네에서 할아버지는 학식이 뛰어난 선비로 통했다. 그렇지만 평소 성품이 과묵하고 대쪽 같으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이 할아버지 앞에 서면 그 기에 눌려 주눅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웃 아주머니들도 할아버지가 어려워 다른 집은 스스럼없어도 우리 집은 마실 올 엄두조차 못 냈다고 한다. 나중에 돌아가시고서야 편하게 왕래했을 정도라고 하니 모시고 사는 어머니도 시집살이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큰언니 선배가 서울에서 우리 시골집에 잠시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E대를 졸업한 멋쟁이 노처녀였는데,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시는 할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 깜짝 놀랐다고 한다. 훤칠한 키, 호리호리한 체격, 지적이고도 날카로운 눈매의 할아버지가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대문을 들어서시는데, 광채가 날 만큼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외국 어느 서부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아 순간 반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빛나는 존재감은 때론 우리 가족에게 든든한 자랑스러움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멋진 할아버지였지만 생전에 자식보다 더 예쁘다는 손주 누구에게도, 다정다감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하는 잔정이라곤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고치던 할아버지가 많이 그립다. 어미가 되어보니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가려주고 싶은 내리사랑의 깊이를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기에.
임정숙 약력
△청주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총무 역임
△청주·청원 1인1책 펴내기 운동 팀장
△저서 수필집'흔드는 것은 바람이다'(2009년)
△문학공간 수필부문 신인상. 2007청주예술공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