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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포탕을 끓여 먹으라며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받았다. 집에 와 풀어보니 꼭지가 싱싱한 너무도 어여쁜 금방 딴 박이다. 평생 박 요리를 해 먹어보지 않아 생소하다. 먹어 없애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게 생겼다.

어린 시절 초가지붕에서 보았던 박을 바라보니 전설처럼 내려오는 흥부전이 떠오른다.

'박타령'에 나오는 판소리 사설에는 가을 들어 박이 여물자, 흥부 내외가 자식을 데리고 박을 타면서 하는 말이 "평생에 밥이 한"이라면서 '밥 한 통'만 나오라'며 '박 속은 끓여 먹고, 바가지는 부잣집에 팔자'고 하였다. 그 많은 식구가 얼마나 배를 곯았으면 밥 한 통만 달라고 하였을까.

부러진 다리를 고쳐준 맘씨 좋은 흥부에게,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싶다. 그 박이 쑥쑥 자라 금은보화를 쏟아냈다는 이 이야기는, 실제로 옛 선인들에게 박이 얼마나 귀중하고 고마운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박은 초가집 지붕마다 탐스럽게 익어가던 열매였다. 그렇게 박은 따로 재배할 땅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심어서 지붕 위로 줄기를 올려두면 저절로 자랐다. 내가 어려서는 바가지만 만드는 줄 알았다. 성장해서야 박속은 파내고 살은 나물로 먹고 껍데기는 삶아 바가지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물 받은 박을 장식용으로 놓아둘까 싶었지만, 박요리를 한번 해볼까 하고 연포탕 끓이는 법을 찾아보았다. 박속을 나박썰기로 썰어 넣고 팔팔 끓는 국물에 산 낙지를 통째로 넣으면 연꽃처럼 피어난다 하여 연포탕이라고 한단다. 잔뜩 기대하였는데 왠지 아쉬웠다. 나는 아직 연포탕을 먹어보지 못했다.

앞에 놓인 박이 너무 사랑스러워 칼 대기가 망설여졌지만, 우선 박속 맛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하여 박나물을 해볼 요량으로 박을 반을 갈랐다. 박속이 눈부시게 하얗다. 그래서 옛날부터 피부가 희고 고운 여인을 보면 "그녀의 피부는 박속같이 희다."라고 하였나 보다. 너무도 보드라운 박속 살의 촉감에 한참을 손을 뗄 수가 없다. 입맞춤도 해본다. 독특한 향내를 맡으며 속살을 손으로 발라내니 쉽게 박 속살이 잘 빠진다. 그 향내는 현란하지 않고 은근하다. 박씨도 제법 많이 들어있다.

좀 더 영글게 두었으면 박씨가 탱탱하게 여물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아쉬웠다. 그 행운까지 얻었다면 우리 집 베란다 화단에다 내년에는 박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텐데….

하얀 박속을 발라내어 무채처럼 채 썰기를 하여 홍고추와 마늘을 넣고 들기름에 볶아 소금간을 했다. 담백한 맛이다. 과육에서 우러난 물기가 박의 단맛과 어우러지면서 달착지근하다. 달기는 달되 그 달기가 넘치지도 않고 조금씩 씹히는 맛이 매끄럽게 입안에서 녹아나는 박나물의 독특한 맛이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박나물 볶음이다.

옛 조상은 제사상에 올리는 탕국에다 무 대신 박으로 박 탕국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박 속살에 소고기를 넣어서 끓인 탕을 즐겼나 보다. 탕국은 제삿밥의 된맛을 중화하는 음식인데 무나 박은 거기 걸맞은 재료인 것 같기도 하다. 무의 시원한 맛과 비겨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무 탕국보다 깔끔한 박탕국의 묘미가 더욱 독특할 듯싶다.

바가지는 선조 때부터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는 무속이나 민속에 흔히 등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사잣밥을 문전에 베풀어 놓고 전염병이 돌면 잡귀가 먹고 멀리 가게하려고 밥과 음식, 짚신을 길에 놓아두었다. 이때도 음식을 바가지에 담아서 놓았다.

바가지는 취사용 도구이지만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데서 귀신을 내쫓는 기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잡귀를 쫓는 데 이용하였다. 모든 액을 없앤다 하여 혼사에 함을 들일 때도 방문 앞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함진아비가 단번에 발로 깨트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내 딸이 시집갈 때 해 본 적이 있다. 이 외에 둥글고 종자가 많은 박은 생명력과 생산성, 불멸성의 상징이 있다.

김정자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청주시문화공로상 수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청주예술공로상

△제7회 홍은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1인1책 펴내기 운동 프로그램 강사,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저서로는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41인 명작품 선집

추석 무렵이면 하얀 박꽃이 한가위 보름 달빛에 반사되어 수줍은 새색시처럼 피어있던 그 박꽃이 그리운 건 왜일까. 박꽃은 해가 완전히 진 후에 서서히 개화를 시작해서 환한 한밤중에 활짝 핀다. '하얀 달빛 아래 소복을 차려입고 밤새워 임을 기다리다 지쳐 동녘이 물들어오면 모든 기력을 잃고 시들어 버린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도 생각난다. 그토록 처연하게 피었던 하얀 박꽃이 보고 싶다.

박은 초가지붕이 없어지면서 사라지는가 했다. 그러나 이렇게 예쁜 박을 선물한 나의 친구는 단독주택 옥상에 갖은 채소를 유기농으로 기른다. 박도 초가지붕에 올라앉는 대신 그녀의 옥상 밭에서 박넝쿨이 잘 타고 오르는 줄을 매어 박 농사를 진다고 한다. 주렁주렁 매달린 박들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문명의 이기 앞에 바가지는 합성 플라스틱의 도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우리 집 거실 장식장에는 장식용 나무 표주박이 걸려있다. 그러니까 현실엔 박은 남았지만, 바가지는 튼튼한 플라스틱 바가지에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졌다.

요즘은 바가지로 쓰이지 않는 대신 박 껍데기 바깥에 그림을 새겨 넣어 비싼 장식품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바가지탈로 만드는데 쓰이기도 하니 한층 더 좋은 세상을 만난 것이니, 농가의 수익성도 훨씬 좋아진 것이리라. 내년에는 나도 박씨를 얻어 우리 집 베란다에 손수 가꾸어 하얀 박꽃을 피워 풍성한 박 농사를 지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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