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유리문을 내리니 쨍한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다. 낮게 앉은 하늘에 뒹구는 낙엽으로 거리는 스산하다. 이젠 대지의 자연은 비우고 침묵하기 위해 가벼워지는 계절인가.
그에 비하면, 해마다 십일월, 이즈음은 내겐 평소보다 업무량이 버거워진다. 출근과 동시에 해결할 일로 산적해 종일 머릿속이 복잡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결과물을 행사를 통해 보여줘야 하는 준비과정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고군분투한 만큼 생색나지 않는 일이어서 때론 허탈감으로 회의에 젖기도 한다. 화려한 장미꽃 한 다발을 받쳐주는 조연 격인 안개꽃이라 말하면 우스운가.
잠시 함께 일하게 된 큐레이터는 곧잘 어리광을 부린다. 전시장 내부의 무언가를 연출할 때마다 '저, 잘했죠?' 대놓고 칭찬을 강요한다. 그녀의 밉지 않은 애교에 안아주고 등 토닥이고 최고라고 손가락을 추켜 세워준다. 확실하게 보이는 물증인 작품으로 그녀의 존재감은 바로 빛나는구나 싶어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네가 맡은 일이니 당연히 할 몫인데 웬 엄살인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대가보다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은 건 아닌지 더러 의기소침할 때도 있다.
솔직히 일이라는 단어는 스트레스와 불안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땐 아무 생각 없이 당장 집안에 들어앉아 무념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일을 멈출 순 없다. 막상 뚜렷한 일없이 산다는 건 또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 어떤 일을 확고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계선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일은 비슷할 거라 본다.
시시포스의 신화가 떠오른다. 신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무거운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끝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은 참 지겹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엄청난 양의 힘을 생성하는 역동적 활동을 영원히 지속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시시포스의 정체성이라면 나의 에너지 창조 욕구도 끊임없는 일을 통하여 가능한 일일 수 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수명이 길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장 풍부하게 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늘어가는 주름만큼 내 안에 채워진 깊은 사유로 진중한 삶을 반영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진정 아름다운데 가끔 주춤대며 게을러지고 싶을 때가 있나 보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일은 능동적으로 하며,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일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다들 어찌어찌하다 보니 지금 하는 일들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축구 국가대표 한 선수에게 인터뷰 중 어떤 사람이 가장 두려운가?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한 말은 "축구를 즐기는 선수가 가장 두렵다"고 답했다. 자기 일을 즐기면서 느끼는 만족감과 성공의 짜릿함만큼 행복한 부자가 있을까.
임정숙 약력
△청주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총무 역임
△청주·청원 1인1책 펴내기 운동 팀장
△저서 수필집'흔드는 것은 바람이다'(2009년)
△문학공간 수필부문 신인상. 2007청주예술공로상 수상
△limjs6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