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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딸애의 방문을 여니 이불은 침대바닥에 떨어져 있고 딸애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 줘도 모르고 잔다. 옆에 데리고 잘 때도 이불을 차내더니 혼자 자도 이불 차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래도 혼자 자는 모습이 기특해 한참을 서 있다 나왔다.

딸애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내가 데리고 잤다. 그러던 딸애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고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딸애가 친구들로부터 아직도 엄마하고 자느냐고 놀림을 받은 모양이다.

이불을 차내고 잠든 딸애를 보니 육 남매가 자라던 친정집의 겨울밤이 생각난다. 여동생 두 명과 같이 한방에서 잤는데 막냇동생의 잠버릇이 고약해 자다 깨는 일이 잦았다. 몸에 열이 많은 막내는 늘 이불을 걷어찼다. 온돌이라 방바닥이 뜨거우니 아예 이불을 발에 감고 잤다. 자다가 선선한 기운이 들어 일어나보면 이불은 아랫목에 모두 뭉쳐져 있기 일쑤였다. 색동무늬가 있는 공단 이불과 꽃분홍색 요를 깔고 잤는데 이불이 아랫목에 엉켜있고 동생들은 추워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그 시절은 난방이 잘되지 않아 방바닥은 뜨거워도 웃풍이 세어 새벽녘이면 코가 시렸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잠든 밤중에 이불을 덮어주러 오시던 어머니의 인기척에 눈을 뜨던 기억도 선명하다. 유난히 기관지를 약하게 타고난 탓에 나는 늘 기침을 하고 살았다. 기침은 이상하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에 더 심해져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한밤중에 내 기침 소리가 조용한 집안에 정적을 깨뜨릴 때면 어머니도 같이 잠을 설치고 이불 한 채를 더 덮어주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는 우리가 이불 차내는 것을 어떻게 알고 매일 밤 이불을 덮어주고 가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딸애를 키워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박종희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제3회 서울시음식문화개선 수필공모전 대상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등 다수

△ 저서 '나와 너의 울림' '가리개'

△ 충북여성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 사무국장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 박종희
몇 해 전까지도 어머니가 해주신 공단 이불을 덮었는데 극세사 이불이 나오고 나서는 침대보까지 극세사 요로 바꾸었다. 극세사 이불을 덮으면 감촉이 참 좋다. 뭐랄까 꼭,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다. 세탁하기도 좋다. 홑청을 뜯어 빨아 시칠 일도 없고, 다림질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도 절약되고 일손도 훨씬 덜어준다.

결혼하고 이불 홑청을 빨아 시칠 때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었다. 어린 시절 이불 홑청을 시치는 일은 집안에 행사처럼 부산스러웠다. 큰 이불을 안방에 펴놓고 한쪽 귀퉁이마다 동생들이 잡고 있었다. 내가 꿰어준 바늘로 어머니가 홑청을 시치는 날은 딸 셋의 잠버릇이 모두 탄로 나는 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잠버릇도 성격 그대로라고 했다. 바로 밑에 여동생은 야무지고 욕심이 많은데, 잠잘 때면 꼭 이불을 혼자 칭칭 감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마음이 여리고 순한 막내는 이불 한쪽 귀퉁이만 걸쳐도 그냥 잠을 잤고 까다롭고 예민하던 나는 동생들이 뒤척거릴 때마다 깨어나 잠 못 들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이불이었다. 선잠을 주무시며 자식들이 못 미더워 한 번씩 꼭 이불을 덮어주고 가신 어머니는 우리가 덮고 자는 이불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도 20여 년간 딸애를 데리고 자면서 숙면을 취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딸애가 차낸 이불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딸애가 이불을 차낼 때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그때마다 엄마는 자식한테 이불 같은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울 때는 걷어차고 추우면 다시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처럼 어머니는 자식한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는 것도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가끔 친정에서 자는 날이면 아직도 어머니는 내 방에 몇 번씩 다녀가신다. 내 기침 소리를 듣고 장롱에서 이불을 하나 더 꺼내 덮어주고 어떤 날은 머리맡에 앉아 기침이 멈출 때까지 앉아계시다 나가신다.

"휴, 밤새 기침하느라 또, 잠을 못 자는구나, 기침하느라 얼마나 힘이 드니."라고 하시며 안쓰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 이불을 덮어주며 혼잣말을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꿈인지 생시인 줄 모르던 다음 날 아침, 이불을 개키다 보면 지난밤에 어머니가 중얼거린 혼잣말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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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