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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10.22 14:44:31
  • 최종수정2023.10.22 14:44:31

이정희

수필가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어수선하게 날리던 가랑잎들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바람에 굴러다니던 나뭇잎 하나가 오토바이 바퀴 속으로 빨려든다. 앞차가 속력을 낼 때마다 팽그르르 돌고는 다시금 주저앉는다.

썰렁한 풍경에 마음까지 시리다. 아직 추수를 끝내지 않은 논을 봐도 그랬다. 며칠 전만 해도 콤바인이 오가면서 추수가 시작되었는데, 가랑비 뿌리는 잠포록한 날씨에 자꾸만 늦어지는 성 싶다. 얼마 후에는 다 베어들이겠지만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지난 주만 해도 쑥부쟁이가 피고 구절초가 곱고 그 위로 철새가 날아가는 풍경은 한폭 그림이었다. 갈볕을 쬐고 있는 허수아비도 빈 들에 혼자 남아 있다는 이미지 같지 않았고, 바람이 외딴 집 감나무 잎을 떨어뜨릴 때는 이삭을 줍는 이미지가 묻어났다.

가랑잎이 구를 때마다 빗소리로 착각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잠결에는 혹여 그렇다 쳐도 대낮에 비설거지를 한다고 놀라 일어날 때는 어처구니가 없다. 속았다기보다는 가랑잎이 날릴 즈음 내리는 탓에 가랑비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싶다. 가을비 하면 가랑비가 떠올랐고 선뜩할 만치 차가운 것도 가랑잎 때문일 게다. 내릴수록 따스해지는 봄비에 비해 가을비 내릴 때는 갈수록 추워졌기 때문에.

쓸어도 보람 없이 수북해지면 나중에는 태워버린다. 불길도 약하고 젖은 삭정이가 타듯 푸슥푸슥 뜸을 들이다가 매캐한 연기 속에서 거뭇거뭇해진다. 한편으로는 갈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늦가을 서곡을 연주하는 갈대가 바람으로 속이 들고 단단해지는 배경이다.

갈대의 몸부림이 잠잠해지면 가을도 얼추 끝물이 된다. 철새가 눈물로 깃을 적시는 즈음이기도 했다. 가을의 새 기러기가 새끼 적부터 미리감치 물결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눈물의 찌꺼기 가랑잎도 푸르른 봄을 위해 거름으로 날 준비를 하는 때다.

시월은 또 풍성한 결실과 조락의 아쉬움이 엇갈리는 절기다. 산이면 산 들판이면 들판이 넘치도록 풍성하지만 그것은 또 작년의 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것을 거둬들이는 자체가 비움의 전조였던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물결 출렁이는 들판을 보면 딱 그 논배미 크기의 금덩이를 박아둔 것처럼 눈아 부셨다. 화려한 들판의 축제를 방불케 했으나 비움이라 해도 여름내 가으내 수고 노심초사한 것을 생각해야 하리. 성큼 베어낸 뒤 그쯤에서 갈무리를 할 때다. 아쉽기는 하지만 거둬들이지 않고는 새로운 결실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살 동안도 비워야 할 때가 있다. 비우면 새로운 뭔가가 채워진다. 스트레스를 비우고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 아픔과 상처를 비우고 행복과 웃음을 채운다.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여유가 찾아온다.

비움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다. 비움은 마음을 정화하고 열정의 공간을 만든다. 더 나은 것을 위한 자리비움에서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빈 자리에는 항상 더 좋은 것이 차오르기 때문에 비움을 통해 세상을 더 크게 담을 수 있다. 비움의 끝자락에는 고요한 평화가 기다리고 있다.

10월은 결실의 계절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갈무리 시점이다. 그러자니 들판은 비움의 공간으로 바뀌고 우리는 조락의 아쉬움에 잠깐 숙연해진다. 썰렁한 들판은 곧 가득 채우기 위한 공간임을 숙지하는 것이다. 노자의 말처럼, 비움이 지극하면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는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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