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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창문을 열었다. 첫 새벽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한데 밤하늘을 순례하던 달이 빨갛게 울먹인다. 며칠 전에는 도톰했던 반달이 눈썹처럼 가냘프다. 누군가 송편 한 개 빚어놓은 것도 같고 아니면 손톱자국을 남겼으리. 밤중인데도 어쩜 그렇게 은빛으로 뽀얗게 떠오르는지 또 어쩜 그렇게 감길 듯 착착 고운 실여울인지 몰라.

가끔은 쪽배처럼도 보였다. 명주 올 같이 부드러운가 하면 손이라도 벨 듯 차가운 느낌이다. 똑같은 그믐달도 꽃 피는 봄밤에는 손톱달처럼 예쁜데 한겨울 굴뚝을 서성일 때는 서슬이 시퍼렇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름달에서 초승달 그믐달 등 이름도 많다. 보름달은 앞산 모롱이에서 뜨고 그믐달은 나뭇가지에서 빛난다. 초승달은 초저녁에, 그믐달은 새벽녘에 빛난다. 천체의 운행 때문이지만, 들쭉날쭉 떠오르면서 한밤중에도 볼 수 있고 새벽잠이 없는 사람은 그믐달을 보게 된다. 쟁반처럼 둥근 보름달에서 조각달로 바뀐다. 깜깜 모드 때문인지 그렇게 위장이다. 하룻밤에 열 칸 방을 헤맨다더니 예쁘장한 생김으로 밤하늘을 순례하는 알쏭달쏭 조각달.

으슥한 골목에서도 생글생글 웃는 새침데기다. 탱자 울을 넘고 가시나무에 걸려도 낯빛조차 바뀌지 않는다. 보통내기는 아니다. 낮에 나온 반달을 보면 낮잠도 못 잤을 텐데 여전히 통통하다. 혹시 쪽잠의 유래가 달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몰라.

산책코스도 어찌나 넓은지 누군가는 창가의 달을 이야기하고 우물 속의 달을 보았다고도 한다. 우물 속에서도 젖기는커녕 달빛을 두레박줄 삼아 올리면 고스란히 담길 듯 했다. 창가에 머물던 초저녁달이 새벽이면 황급히 달아난다. 그나마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그 행선지와 처소는 아무도 모를 테니 정체가 궁금하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나그네였을까. 달은?

우선은 가시거리가 넓다. 동구 밖의 소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솔가지에 걸린 달은 보인다. 동구 밖이라야 한 마장이다. 반경이 넓기도 하지만 38만㎞ 떨어진 달이 보이는 것은 밤하늘의 신비일 밖에. 별이 빛나는 밤 개울가에 부서지는 옥구슬은 물 속 하늘의 또 다른 진주 벌이다. 침묵의 바다를 수놓는 밤이라 별빛도 짜장 고왔을 테고.

보름달은 하늘 복판의 큰길로 다니고 초사흘 달은 오솔길만 찾아다닌다. 뒷동산 솔숲에 자리를 잡고는 유유자적 머무르다가 바람 솔솔 상쾌한 밤에는 호숫가를 누비면서 취객을 유혹한다. 얼간해진 눈에는 호수만한 술동이에 영롱한 사기 술잔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알쏭달쏭 조각달의 정수라고나 할까.

밤안개 자욱이 끼던 날 어스름도 같고 으스름도 같은 보름달을 보았다. 발음부터가 헷갈리지만 어스름달은 뜨는 시각을, 으스름달은 어슴푸레 비치는 달빛을 나타낸다. 시간적으로는 어스름달이되 안개가 끼면 으스름달이다. 검기울어 가는 초저녁과 동살 퍼지는 '어슬녘' 달이지만 안개와 구름 때문에 반나마 비치는 게 자못 신비스럽다. 초승달 그믐달이야 당초부터 그랬지만 보름달이 그믐달 초승달처럼 새침한 것은 볼수록 만추의 서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대장군의 위상을 가졌다. 달을 중심으로 수많은 별이 집결된 것을 보면 군사를 지휘하는 모습이다. 순찰하다가 지루해지면 나뭇가지 걸리고 골짜기에도 숨겠지. 가장 큰 목적은 잠 못 드는 누군가의 창문을 비추는 것 아닐까. 흐리고 비 오는 날은 혼자 애태웠으리. 매일 밤 뜨는데도 애착이 간다. 밤이 아니면 곤한 영혼은 위로받을 수 없고 소망조차 품을 수 없다는 공통적 화두 때문이다.

태양빛은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부드러운 달빛 느낌은 정신적 지킴이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눈물짓건만 여전히 환하다. 뜨고 지는 시각과 달라지는 모습 또한 달의 신비라기에 손색이 없다. '밤중에 광명으로 너만한 게 또 있으랴'는 윤선도의 글귀처럼, 달 밝은 밤의 서정은 끝내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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