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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와인을 좋아한다. 맛도 맛이지만 투명한 보랏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특별히 말간 유리잔에 따라놓은 빛깔을 보면 노을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보라색 옷을 좋아하는 것도 아련한 색감 때문이다. 늦가을과 이른 봄에 입으면 푸근한 느낌인 것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성 싶다. 포도를 가꾸는 농부가 있었다지. 어찌나 게으른지 남들은 서리가 오기 전에 갈무리한다고 법석인데 하루 이틀 미루다가 급기야 된서리를 만났다.

상품으로 팔 수 없게 되자 포도즙을 만들었고 그게 정통 와인 맛의 원조다. 농사꾼으로는 젬병인 사람 때문에 만들어졌으나 서리가 내리면서 고유의 맛을 연출한 게 더 감동적이다. 서리가 아니면 와인은커녕 죄다 상했을 테니까.

와인은 가을의 빛깔이다. 오래 전 포도농사를 했던 친구네 집에서 보았던 노을이 떠오른다. 언덕배기 과수원에서 보면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금방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포도는 뒷전이고 높은 언덕에서 보는 해거름 정경에 더 마음이 끌렸다. 눈을 들면 산자락 너머 이제 막 지는 태양과 함께 울먹이는 하늘이 보인다. 저녁이면 누군가 서쪽 하늘 달려 가 울먹이는 듯 어스름한 기운과 함께 수많은 색지를 겹겹이 붙인 저녁노을은 환상이었다.

여느 때도 볼 수 있지만 자울자울 번지는 꼭두서니 빛 여운은 가을만의 진풍경이다. 노을이라 해도 여름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질감은 써늘한 가을의 바탕화면에서 나왔다. 가을이면 그렇게 두 가지 색깔에 매료되었다. 앞서 말한 와인 빛깔이 그렇고 그 다음 좋아하는 것은 군청색이다. 써늘할 정도로 시린 하늘이라 노을이 그처럼 색다르게 다가왔으리.

여름에는 하늘색이라고 하듯 파랗기만 했는데 그 때는 군청색으로 바뀌었다. 포도마냥 시행착오로 빚어진 유다른 빛깔이 떠오른다. 여름의 초록은 따스한 날씨 때문인지 연둣빛 색감이 미세하게 묻어나왔는데 같은 초록이라도 붉은 빛깔을 다독이는 것처럼 짙푸르기만 했던 이미지가 선하다.

늦가을이 되면 마을 앞의 냇물도 짙푸른 색으로 흐른다. 이어서 초겨울이 되면 계절은 지금보다 훨씬 진한 초록을 준비했다. 길을 가다 보면 파랗게 촉을 틔운 보리 싹을 볼 때가 있고 한편에서는 엉망으로 짓밟힌 게 띄었다. 웃자라지 않게 밟는 것인데 보리밟기가 뭔지 모를 때는 당황했다가 이른 봄 눈도 채 녹지 않은 땅에서 파랗게 쳐든 싹은 밟을수록 푸르러지던 색감 그대로였다.

한 농부가 잘못해서 보리싹을 밟은 뒤 얼마 후 더 많은 보리이삭이 달리는 걸 보았다. 보리밟기의 배경이 아닌지 모르겠다. 뿌리를 들뜨기 않게 하는 건 물론이고 한 번 꺾인 후 더 많은 이삭을 열리게 하는 차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실수였으나 좋아하는 빛깔 모두가 앞서 말한 와인의 경우와 함께 뜻밖의 시행착오에서 파생되었다는 게 묘하다. 녹음도 갈맷빛으로 짙어지기는 하나 모진 추위를 딛고 올라온 터라 훨씬 더 강렬하다.

좋아하는 와인 빛깔의 원조가 게으른 농부의 시행착오로 만들어졌다면 신비의 배경도 때로 엉뚱한 데서 나온다. 서리 맞은 포도가 특별한 와인 맛을 내고 웃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밟아댈수록 강렬해지는 보리의 진초록 이미지를 보면 시행착오도 필요하다.

시행착오 앞에서 쩔쩔맨다면 그 또한 시행착오다. 게으른 농부 때문에 와인과 웃자라는 것 때문에 나온 보리밟기는 같은 맥락이었다. 나무도 비바람을 모르면 강해질 수 없다. 노련한 선장의 면모도 태풍을 헤쳐 나가는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비롯되었다. 서리를 맞지 않은 포도는 신선해서 좋고 서리를 맞는다 해도 와인을 만드는 차선책이 있다. 서리를 맞는 것 같은 역경이 닥친다 해도 와인 맛의 의미를 생각하면 사는 게 훨씬 수월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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