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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노을이다. 하루가 꼴깍 넘어가면서 서쪽 하늘에 핏빛 눈물강이 생겼다. 물꼬가 터졌다. 붉은 물이 와락 쏟아지는 걸 보면. 기슭에 물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꽃잎이 뚝뚝 떨어진다. 매일매일 지는 해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빛나는 저녁 해는 붉은 비단실 감아둔 도투마리였을까. 붉은 안경을 쓰고 보는 듯 붉은 언덕과 붉은 초원이 눈부신데 코발트 빛으로 떠오른 호수가 딱 그 자리만치 푸르다. 추억의 돛배 한 척 띄우자마자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린다. 눈앞에 빤히 떠오른 별천지가 예쁘다. 추억의 필름에 담고 싶을 정도로.

저녁이면 서쪽 하늘 달려가 울먹이는 사람을 알고 있다. 해거름이면 앞뒤 잴 것 없이 달려가서 그리움 쏟뜨리는 사람이다. 언제부터 쟁여둔 그리움인지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은 합수머리에서 활활 타오르던 노을강 사연. 하필 왜 서쪽 하늘이었는지, 그리고 왜 오늘이 끝나는 해거름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야 하는지 지평선 뻗어나간 봉우리는 혹 알고 있으려나.

넘어가는 태양은 슬펐던 거다. 참다 참다 저녁이면 서쪽 하늘 달려와 답답한 속내를 풀어내는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어쩜 그렇게 타오를 듯 붉은 강인지 몰라. 슬픔으로 번지던 노을은 먼 서쪽 나라 사람들의 아침노을로 떠오르겠지. 서쪽 나라 바탕화면은 붉은 색지였다고 하면서.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빨강 주황 노랑과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등의 무지개 빛깔로 분리된다. 붉은색에 가까울수록 파장은 길고 산란은 약해지는 반면 파란색에 가까울수록 파장은 짧고 산란은 왕성해진다. 하늘도 태양고도가 높을 때 푸르다. 저녁이면 파장이 짧은 파란색은 흩어지고 파장이 긴 붉은 색만 저녁강 하류에 이른다. 불붙는 강처럼 뜨겁게 뜨겁게 하루를 끓이는 중이었는데.

그리고는 누구였을까. 구슬 같은 해를 담쏙 올려놓은 채 붉은 비단 잣는 손길은. 서쪽 하늘 넘어간 별도 그다음 동쪽 하늘에서 또 다른 빛남을 준비할 테니. 어둠이 가야 밝음이 온다. 오죽해서 어둠의 바탕화면에 별을 새기고 꿈을 새기면서 휴식을 마련했다. 빛의 산란과 파장 때문에 이름조차 고왔던 저녁노을 일대기.

제 1장 1막은 그렇게 끝났다. 장면이 바뀌어서 붉은 초원과 푸른 호수는 간데없이 바다가 보였다. 눈썹 같은 수평선 지나 굴뚝처럼 보이는 것은 얼어붙은 바다의 등대섬이다. 눈감으면 찰싹이는 파도에 뚜뚜뚜 뱃고동 소리. 불붙은 채 정지된 세상이 갈매기를 날려 보낸다. 금방 또 전원마을로 바뀌었다. 오솔길 돌아 언덕 끝으로 자그마한 시냇물이 나왔다. 드문드문 먹구름이 고향마을의 징검다리를 보는 듯하다. 붉은 비단도 같고 꼭두서니 빛 산자락 잡으러 간들 또 멀어지겠지· 신기루처럼.

서쪽 하늘 일부를 떼어보았다. 오늘은 노을강에 수장되지만 새로운 태양의 산란을 위해 저녁노을 강까지 흘러온 붉은 빛 연가. 석양의 행로를 추적하면 그리움을 담은 고향의 개울이 먼 서쪽 노을 강으로까지 흘러왔다. 노을을 보면 아련해지고 사무치곤 하더니, 파장이 길고 지구력이 뛰어난 붉은색이 남아서 그리 장관을 이루었던가.

해가 지고 마침내 어둠이다. 붉은 강 스케치에 빠져 있던 누군가도 화폭을 걷어치웠다. 암흑의 먹지가 하늘을 촘촘 덮는다. 성미 급한 개밥바라기별이 혼자 어둠을 밝힌다. 나도 외로움을 밝히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 밤도 내일을 위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겠지? 어둠을 깨면서 별을 새기는 밤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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