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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뚝배기의 박지기장이 바글바글 끓는다. 밥을 먹기 시작한 게 10분 남짓인데 여전하다. 박지기 장 한 숟갈에 호박과 두부와 파를 넣은 게 전부였건만, 특유의 구수한 맛이 돋보인다. 찌개는 모름지기 오래 끓어야 맛이 나는 걸까.

불현듯 더디 가는 삶이 그려진다. 급하다고 가스를 올려 봐야 기본으로 달궈지는 시간이 필요한지 가장자리가 탈 뿐이고 소정의 시간을 채우고서야 끓는다. 아차 싶어 도중에 줄이곤 하는데 어쩌다 고온으로 끓이다 보면 건더기가 익지 않아 설컹설컹하다. 바글바글 끓은 맛 같지 않고 화덕 내 비슷한 냄새가 나서 맛이 덜하다.

친정어머니는 생선조림을 할 때마다 뚝배기에 안치셨다. 다른 그릇보다 두꺼워 그런지 바닥에 깐 무도 한결 부드럽다. 달걀찜을 할 때도 은근한 불에 익히므로 맛이 각별하다. 두껍고 투박해서 끓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가 볼품은 없어도 특유의 맛 때문에 찌개와 조림 등 다용도로 쓰인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다.

바글바글 끓어나는 뚝배기는 옮길 때도 편하다. 스테인레스는 뜨거워서 잠깐 식혀야 되지만 뚝배기는 끓어날 때 옮겨도 과히 뜨거운 걸 모른다.

천천히 오래 달궈진 그릇이라 뜨겁기는 해도 손을 델 정도는 아니다. 쉽게 뜨거워진 그릇은 금방 식고 자칫 데기도 한다. 빠르기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질그릇의 된장찌개가 맛있는 것도 두 번 세 번 구워 만든 뚝배기에 안쳐서 오래 끓인 때문이다. 일단 모양을 낸 후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에 들어갔으니 그 과정도 지루했다. 초벌구이를 한 뒤에도 그늘에서 여러 날 말린다. 천천히 오래 끓는 데서 파생된 느림표 노하우는 만들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래 끓는 게 천천히 데워지는 거라면 질그릇처럼 오래 뜨거운 사람이고 싶다. 은근한 불에 일군 누룽지는 아무리 두어도 타지 않는다. 타기는커녕 더욱 두껍게 눌어붙어 한결 구수하다. 온기는 괜찮으나 지나친 열기는 밥을 태우고 냉골 내까지 풍긴다. 진솔한 정 때문에도 천천히 뜨거워져야 맞다.

내 삶의 악보에 적힌 빠르기표를 점검해 본다. 전정한 속도의 안배는 천천히 붙는 가속이고 서두른 만큼 뒤처진다. 된장만 해도 메주를 만들고 콩을 삶아 버무릴 동안 반 년은 걸린다. 금방 크는 게 한계도 쉬 온다면 느린 게 진짜다.

허둥지둥 달려간 후에는 돌아오는 게 더 힘들다. 원만한 속도가 오래 오래 괜찮은 삶을 만든다는 걸 모른 채 지름길을 가면서도 초고속을 원한다. 가장 멋진 빠르기는 속히 갈 수 있는데도 한 걸음 뒤처지는 여유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자세는 안단테 악보로써만 가능하다.

살다 보니 빠른 게 전부는 아니었다. 속도는 별반 중요치 않은 인생의 스케치, 오래 오래 괜찮은 삶을 보는 것 같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속도를 끌고 가다 보면 느린 만큼 빨라지기도 한다. 오래 오래 변함없는 진솔한 정 때문에도 천천히 뜨거워져야 맞거늘 한꺼번에 욕심을 낸다.

못생겨도 오래 뜨거운 질그릇 같은 사람이 드물다. 뭔가 속히 될 때는 와짝 타는 검불마냥 재티만 날릴 수 있다. 우리 꿈도 조급히 굴다가 무산되기 쉽다. 천천히 가는 습관이야말로 빠르기에 중독된 현대인의 최고 처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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