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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내가 그 섬에 상륙한 것은 찔레꽃 가뭄이 시작되는 5월 초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물이 빠지는 바람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실망했다. 삐죽삐죽 돋아 난 풀은 억세게만 보이고 널려 있는 조약돌은 칙칙했다. 귀여운 풀꽃도 막상 와 보니 그림같이 예쁘기는커녕 까칠하게 시들었다.

개울 복판에 솟아난 돌무더기를 섬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 년 전이다. 언젠가 개울을 지나는데 기슭에 너덧 개 섬이 보였다. 개울가에서 보면 무더기로 올라왔었지. 강이라기엔 좁고 개울로 보기에는 넓은 샛강에 빗물이 찰랑대면 엉성한 돌무더기에 풀이 다보록해진다. 손은 말리고 아랫목이 생각날 때면 어깨동무나 하듯 솟아났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초록을 몰수한 꼭두서니 섬이고 이제 막 쳐들기 시작한 갈맷빛 언덕이다. 자세히 보면 스무 남은 개 똑같이 엎드러진 돌막뿐이고 눈에 띄는 건 다문다문 풀포기뿐이지만 단풍이 들고 갈대가 흔들리면 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이 예쁘장하다. 가을에만 돋는 한해살이 섬이었을까.

가고 싶은 적은 많았다. 하지만 물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백로가 오락가락하면 섬도 함께 들썩였다. 조각난 것은 모서리 궁합으로 아귀가 맞는지 진초록 섬도 연달아 태어났다. 처음 1개였던 것이 해가 갈수록 서너 개에서 지금은 오륙도라고 해도 좋을 만치 늘었다.

섬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다시 태어나는 일대기였다. 이른 봄 얼음이 녹을 때는 차가워서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다음에는 또 봄장마가 되고 벌창을 한다. 그리고는 가뭄과 함께 물이 줄었다. 벼르다가 상륙은 했으나 후회막급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며 환상에 젖고 설레던 때가 좋았다.

이루지 못한 꿈도 가끔은 다행인 걸까. 훨씬 앞전에 들어갔더라면 더 실망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고향의 앞산에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생각났다. 꽤 높은 산인데도 우산을 펼친 것 같은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장날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얀 백조처럼 보였다. 구름은 더 뽀얗고 바람도 싱그러울 것 같아 무작정 산을 넘었는데 가난한 시골 동네다. 구름이 쉬어갈 만한 언덕도 보이지 않고 옹달샘은 바싹 말랐다. 무성한 덤불과 드문드문 초가집 또한 둥지같이 예쁘기는커녕 기둥이 패이고 잡초가 어지러웠다. 환상의 나무는 곰삭은 채 밑동이 드러났고 가지는 반나마 죽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다. 산에 오르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무너진 환상이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어도 괜찮을 걸 그랬다. 산을 넘지만 않았어도, 설혹 그렇더라도 가까이 가지만 않았어도 오래도록 신비로웠을 텐데 싶어 아쉬웠다. 꿈은 아울러 무지개는 가까이 가면 오히려 식상되는 거였다. 노심초사 무지개를 잡으려다 끝내는 실망하고 돌아선 누군가처럼 나 역시 이루고 나면 신비로울 게 없는 꿈의 실상을 보았다.

개울가의 섬에 상륙했다가 놀란 기억 그대로다. 옹기종기 일궈 낸 돌무더기에 풀이 자라고 단풍이 들면 그 새 가을이 되곤 했었지. 기러기 발 사이로 잿빛 구름이 떠다니면 초겨울이고 첫눈에 함박눈에 뒤덮일 때마다 돌섬으로 태어난 게 참 신비했는데 꿈이 무산될 때는 그 정경이 떠올랐다. 어릴 때 일 차 겪었기에 그나마 놀라움은 덜했다. 의욕이 사라지곤 했어도 그게 삶이고 인생이다. 나의 꿈이고 환상이었던 풍경은 실망했지만 멀리 드러난 길과 아름드리나무는 여전히 고풍스러웠던 것처럼.

험한 절벽 까까비알에서 찾아낸 물망초가 흔한 잡풀인 경우도 많지만 가까이 가지만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 막 섬에서 나와 언덕에 올라서니 천연스레 다시 예쁘게 보인 것처럼 간격이 필요하다. 어릴 적 실망과는 달리 멀리서 볼 때 지금도 그 산은 아늑했던 것처럼. 뭔가 자꾸 실망이 된다면 가까이서 집착해 온 결과다. 꿈은 꿈이었을 때가 최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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