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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한 소년이 무지개를 보았다. 신기한 마음에 달려가니 금방 사라졌다. 돌아서는 순간 문득 앞산에서 어른거렸다. 보이지 않으면 포기라도 할 텐데 잡을만하면 사라지고 포기할만하면 어른거린다. 모든 걸 단념하고 돌아설 때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학창 시절 김동인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일생을 걸만한 무지개의 실체를 생각했다.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지는 못했어도 너무 연연했던 것 같다. 누구나 꿈은 소중하다. 이루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겠지만 적당히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릴 적 앞산에 느티나무가 있었다. 제법 높은 산이었는데도 또렷이 보였다. 장날이면 산자락 오솔길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득한 거리 때문인지 새하얀 백조처럼 보였다. 그림 같기도 꿈속 같기도 한 정경에 무척 설렜다. 얼마나 큰 나무였는지 동구 밖 과수원에서도 보이고 달음질을 할 때도 보였다.

은행잎을 줍거나 잠자리를 쫓아다닐 때도 보였다. 눈만 뜨면 보이는 환상에 한 번 가 봐야지 결심했다. 제법 높은 산이다. 엄두를 내지 못했다가 12살 때 급기야 산을 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언덕이나 옹달샘 하나 없이 무성한 덤불과 초가집뿐이다. 그나마도 둥지같이 예쁘기는커녕 기둥이 패이고 잡초가 어지러웠다.

문제의 나무도 줄기는 곰삭은 채 밑동이 드러나 있고 가지는 반나마 죽어 있었다. 산은 넘지 말았어야 했다. 넘었어도 가까이 가지는 말았어야 했다. 한동안 심란했지만 잊을 수 없는 로망이었다. 실망은 했어도 멀리서 볼 때는 여전히 꿈같은 풍경이었기 때문에.

이후 고향의 풍경은 날이 갈수록 바뀌었다. 우연히 친정에 가면 남의 동네에 잘못 온 것처럼 낯설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던 은행나무 고개는 오래 전에 도로가 나버렸다. 어느 날 보면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은 사라지고 공장이 들어섰다. 동구 밖의 아카시아 꽃길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괜히 낯설고 어색했지만 느티나무는 무사했다. 그것만 있어도 추억으로는 괜찮다고 했는데……

하지만 얼마 후에는 그마저 없어졌다. 우산을 펼친 것 같은 아름드리나무가 사라진 것이다. 30년 세월에 그러려니 했지만 막상 보니 혼란스럽다. 추억이 사라지고 꿈이 잘려나간 것처럼.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고향을 모두 잃은 것 같다. 허전한 마음으로 가는데 동구 밖으로 나지막한 등성이가 보인다.

세상에, 어릴 적 나의 아지트가 남아 있었구나. 올라가면 십 리 남짓 달천 평야가 들어왔다. 생각에 잠기다 보면 달래 강 철교를 가로지르는 기차가 나타났다. 옆에서 들을 때는 귀를 막아야 했던 칙칙폭폭 소리가 꿈결처럼 멀어진다. 멀리서 바라본 풍경 중에 백미라고 할, 추억은 남아 있었다.

새삼스러운 표현으로 멀리 있는 게 아름답다. 가까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답게 보이련만 공연히 애를 태운다. 소년이 실망한 것도 잡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멀리 두고 봤으면 참으로 아름다웠을 텐데 유감이다. 몽고족 사람들이 대부분 시력이 좋은 것도 초원에서 멀리 보기 때문이란다.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다면 하나쯤은 그냥 둬야 하리. 그 아지트 역시 언제 사라질지 모르나 멀리서 바라보던 기억만 남아 있으면 충분하다. 잘려나간 느티나무 역시 설렜던 기억만 놓지 않으면 되겠다. 잘리지 않고 건재했다면 한 편 글로 다듬지도 못했다. 잡을 수 없는 꿈이야말로 미완의 추억으로 남겨둘 만하다. 이루고 나면 더는 꿈이 아닌 것도 가끔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일수록 추억의 목록에 적어두는 것이다. 누군가의 창가를 비추는 별처럼 외롭고 쓸쓸한 가슴을 보듬어주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내가 먼 곳을 동경해 왔듯이 먼 곳을 꿈꾸는 누군가의 환상으로 남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까맣게 멀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으로 봐야 아름다운 것처럼 이루지 못했어도 추억 하나 곁에 소중히 남겨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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